[광화문에서/김창혁]광장의 공포

  • 입력 2005년 1월 30일 17시 33분


마치 놋그릇을 닦아 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볏짚 뭉치에 연탄재를 잔뜩 묻혀 놋그릇을 닦으면 거무튀튀하던 놋그릇이 신기하게도 다시 살아나 번쩍거렸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와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을 보는 느낌이 그랬다. 자유, 민주주의, 광장, 폭정…. 1980년 대학 신입생이던 기자를 가슴 벅차게 하기도 하고, 분노로 몸을 떨게 만들기도 했던 단어들이 다시 번쩍거리는 놋그릇들이 되어 다가왔다. 지난 시대의 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그 말들이 21세기 초엽 새 질서의 명제가 되어 나타났다.

광장(廣場)의 공포는 특히 새삼스러웠다. 옛 소련의 반체제인사로 현재 이스라엘 장관인 나탄 샤란스키 씨의 ‘민주주의론’에서 빌려온 말이라지만 그리 낯선 얘기가 아니었다.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다.

‘80년 서울의 봄’이 지나간 뒤 이 땅엔 광장의 공포가 몰아닥쳤다. 대학 캠퍼스 벤치에 앉아서도 말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주위를 둘러봐야 했다. 숨어서 ‘민주주의 만세’를 불러야 했다.

2003년 3월 미군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전의 이라크가 그랬다. 후세인 정권 치하의 공포는 전두환 정권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 같다. 쿠르드족 대학살은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고도 남는다.

30일 이라크에서는 총선이 실시됐다. 195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실상 처음 치르는 민주선거다. 온전한 선거는 아니다. 미군과 다국적군, 그리고 이라크 군경을 포함해 모두 30만 병력이 비상경계태세를 펼친, 말 그대로 군사작전 같은 선거였다.

“자유 이라크를 향한 위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호언장담을 무색하게 할 만큼 선거는 테러로 얼룩졌다.

하지만 그뿐일까.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도 미군정 하에서 최초의 민주 총선을 치렀다.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이 소련과 김일성의 반대로 무산되자 유엔은 38선 이남 지역의 단선(單選·남한단독선거)을 결정했다. 주로 좌익의 소행이었지만, 미군정 기록은 단선을 전후해 남한에 ‘사실상의 내전 상황’이 벌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경찰지서, 선거사무소 공격, 파업 및 태업, 테러로 약 4개월 동안 하루 평균 6명이 죽어 나갔다고 전하고 있다.

이라크와 우리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이 안보 이익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을 한 묶음으로 ‘실험’한 현장이라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이식(移植)’된 것이라 해도 미군정이 이 땅에 심은 자유민주주의의 기억은 독재와 폭정에도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라크와 한국.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정을 경험한 지구상의 몇 안 되는 나라다. 앞으로도 이라크엔 많은 질곡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6·25전쟁과 같은 내전을 치를지도 모르고, 또 다른 압제와 폭정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2005년 1월 30일의 선거는 민들레 꽃씨처럼 자유와 민주주의의 씨를 뿌릴 것이다. 언젠가는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 장병들도 그 현장에 가 있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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