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自虐 경제관’ 이젠 버려야

  • 입력 2005년 2월 3일 17시 44분


2001년 여름, 때 아닌 강소국(强小國) 바람이 불었다. 핀란드나 아일랜드처럼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 바람은 그해 6월 필자를 더블린에 실어다 놨다.

아일랜드는 과연 ‘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나라였다. 20% 가까운 실업률에 시달리던 유럽 최빈국(最貧國)이 불과 10여 년 만에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1인당 국민소득에서 영국을 앞지르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외자유치 시스템과 공무원들의 친절은 세계의 ‘교과서’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교통 통신 등 인프라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더구나 외국기업을 빼고 나면 기업다운 기업이라고는 없는 쭉정이 경제였다. 아일랜드 모델은 부산 하나 정도라면 몰라도 4800만 명을 먹여 살리려다가는 금방 힘에 부칠 ‘미니 엔진’이었다. ‘유럽의 기적’도 ‘한강의 기적’ 앞에서는 초라했다.

아일랜드뿐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에 산업화 시동을 건 나라 중 한국만큼 눈부시게 경제를 일으켜 세운 곳은 없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기업들의 성과는 특히 두드러진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 우리 경제와 기업을 보는 눈은 자학(自虐)에 차 있는 듯하다.

일자리 창출의 주역인 대기업을, 재벌(財閥)이라는 이름 아래 탐욕적이고 전근대적인 이미지 속에 가두어 놓고 있다. 친(親)기업은 친(親)재벌, 곧 양심을 팔고 기득권을 편드는 행위로 매도된다. 한국 대기업의 경영에 대한 수식어는 독단경영, 황제경영, 문어발경영, 빚더미경영 등 부정과 비하 일색이다. 세계 유수의 경영대학원에서 성공사례로 연구하고 있는 한국 대기업 고유의 경영전략과 스타일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우리 용어가 단 하나라도 있던가. 자학은 분별없는 외제선호 증상을 수반한다. 정부 여당은 미국식 기업지배구조와 집단소송제를 개혁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떠받든다. 여당 지도부와 대통령 참모진은 네덜란드 노사모델이 좋다, 아일랜드식 선진사회협약을 추진하겠다, 독일식 강중국(强中國) 발전모델이 필요하다는 등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만국의 모델이여 집합하라’고 외칠 참인가.

물론 이유 없는 자학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런 증상을 일으키고도 남는 심한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쇼크)였다. 한국형 경제성장과 경영모델에 대한 반성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졸업한 지 이미 3년 반이 지났다. 실패의 교훈은 경제유전자 안에 새겨야겠지만, 자학에서는 벗어날 때가 된 것이다.

작년에 순이익을 100억 달러 이상 낸 순수 제조업체는 세계에서 도요타자동차와 삼성전자 2개뿐이라고 한다. 소니 등 일본 10대 전자·전기업체의 순이익을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의 절반밖에 안 된다. 이런 기업을 만든 것은 미국식 지배구조도, 네덜란드식 노사모델도, 독일식 연구개발도 아니다. 일부 정부부처와 시민단체가 자학해 마지않는 우리 모델이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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