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국문학자 양주동박사 별세

  • 입력 2005년 2월 3일 18시 17분


‘우리 겨레가 워낙 낙천적인 농업 국민으로서 노상 웃음을 띠는 갸륵한 민족성을 가졌거니와, 나는 그러한 겨레의 후예로서도 특히 웃음을 더 많이 물려받아, 내 자신 웃기를 무척 좋아하고 남이 웃는 것을 사뭇 즐기고 축복하는 자이다.’(수필 ‘웃음설’)

1977년 2월 4일, 자칭 ‘인간 국보(國寶)’이자 ‘소권(笑權·웃을 권리) 옹호론자’인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국문학자이자 수필가였고, 라디오 토크쇼 고정출연자로 전 국민에게 친숙했던 대중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자타가 인정했다. 20대에 영문학을 전공해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시인으로서도 문재(文才)를 뽐냈다. 30대에 불현듯 신라 향가를 파고들더니 40세에 불후의 명저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어머니 노래가 그의 시요, 뭇 고교생이 달달 외웠던 ‘찬기파랑가’가 그의 해독이다.

천재성의 바탕에는 천진난만한 학구열이 있었다. 영문법을 독학하다가 ‘3인칭’이란 단어가 막히자 30리를 걸어 읍내 선생님을 찾았더랬다. 설명을 듣고 희열에 들떠 “내가 1인칭, 너는 2인칭, 그 외엔 우수마발(牛수馬勃)이 다 3인칭이니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이야기(수필 ‘면학의 서’)에는 흐뭇한 미소가 깃든다. ‘기하’(幾何·도형과 공간을 연구하는 수학부문)의 한자를 뜻풀이하면 ‘몇 어찌’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난감했다는 회고(수필 ‘몇 어찌’)에서는 똘망똘망 눈망울을 굴리는 학동이 떠오른다.

그 천진난만함은 웃음과 한몸이다. 부의금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상주(喪主)가 틈만 나면 ‘유장한 베이스’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더란다.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상가에서 껄껄 웃다가 쫓겨났다는 일화(수필 ‘웃음설’)는 가히 블랙코미디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100년 뒤 남을 한 권의 책’이라고 극찬했던 그의 ‘조선고가연구’도 이제는 후학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저승의 양 박사는 과연 노여워하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후학들의 꿈에 나타나 “그래, 너는 국보 2호 해라”라며 껄껄 웃는 것이 그의 풍모에 걸맞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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