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코리아]제1부 이것만은 고칩시다<6>명절증후군

  • 입력 2005년 2월 4일 18시 02분


《‘형편이 어렵다며 빈손으로 와서 갈 때는 이것저것 싸가는 동서’, ‘빨리 가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고스톱을 계속 치는 남편’, ‘기름 냄새 맡으며 간신히 부쳐 놓은 부침개를 날름 집어먹는 친척’, ‘며느리는 친정 안 보내면서 시집간 딸은 빨리 오라고 하는 시어머니’…. 지난달 말경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명절 때 속 터지는 일’이란 제목의 이 글에는 ‘어찌 그리 며느리들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지…’, ‘맞는 말밖에 없네요’ 등의 답글들이 순식간에 달렸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날이 된 지 오래다. 온갖 가사노동에 허리가 휘는 주부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선물과 세뱃돈, 제사상 마련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큰 장남들, 어려운 경제사정에 귀향하는 자식들 눈치만 보는 부모들, 일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백수’와 노총각 노처녀들…. 이들에게도 명절은 ‘공포’다.

가능하다면 명절을 기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런 공포는 실제 우울증이나 자살충동 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맏며느리인 주부 이모 씨(54·경기 성남시)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신다. 명절엔 많은 가족이 본가로 모이는데도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 늘 섭섭하다.

남편에게 어려움을 토로해 보기도 하지만 뾰족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병까지 앓게 되자 지난해 8월 마침내 한 대학병원 정신과의 문을 두드렸다.

여자들에게 집중되는 노동과 가부장적 제사문화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명절 때는 온 가족구성원이 한데 복잡하게 얽히다 보니 그동안 쌓인 감정의 골이 한꺼번에 분출되기도 한다.

한 누리꾼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지난 추석 때 술을 마시고 선친 묘소를 누가 관리하느냐는 문제로 형제들과 대판 싸웠다’며 ‘이번에는 아예 형제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잠깐만 고향집에 들를 예정’이라는 글을 남겼다.

세상이 좋아지고 일이 편해졌는데도 이렇게 명절증후군을 경험하는 이유는 빠르게 변화하는 가치관과 전통적인 대가족 문화가 충돌하기 때문.

이홍식(李弘植) 연세대 의대 부속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장은 “취직이나 결혼 등에 관한 질문을 주위 사람을 빗대서 하는 경우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평소의 스트레스가 명절이 되면 이런 경험으로 심각해져 자살 시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친척들에게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이 같은 명절증후군과 관련해 여성 단체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명절문화 개선을 위한 갖가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포털사이트 ‘아줌마닷컴’은 설날을 맞이해 ‘2005 즐거워라, 우리 명절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장보기나 심부름 등을 온 가족이 함께 나눠 하자는 운동이다.

한국여성민우회도 1999년부터 ‘가족들의 역할 분담’ ‘시댁 친정 구분 안하기’ 등 7가지 ‘평등 명절 지침’을 마련해 ‘웃어라 명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이 기사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박은영(경희대 정치외교학과 3년), 박창진 씨(고려대 사회학과 3년)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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