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술을 마시지요?”
“잊기 위해서 마신단다.”
“무엇을 잊으려고요?”
“부끄러운 것을.”
“무엇이 부끄러운가요?”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어린 왕자는 다시 지구별로 내려와 ‘고요한 아침의 술 동네’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로 갔다. 마을 통계에 의하면 그곳 어른들은 지난해 소주를 한 사람이 86병씩 마셨고, 양주도 300mL나 마셨다고 한다.
술 마시는 습관도 특이했다. 소주나 양주가 담긴 작은 잔을 맥주가 담긴 큰 잔에 넣어 한꺼번에 마셨다. 그것은 ‘폭탄주’라고 불렸는데, 빨리 삼키는 사람은 더 큰 박수를 받았다.
어린 왕자가 박수를 받고 자리에 앉은 아저씨에게 물었다.
“왜 폭탄주를 드시나요?”
“잊기 위해서.”
“무얼 잊으려고요?”
“두려움을.”
“무엇이 두렵지요?”
“술을 안 마신다는 사실이.”
“…….”
앞의 이야기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뒤의 것은 어린 왕자가 한국에 오면 어떤 일이 있을까 상상해 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술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모두 ‘위하여’ 하는데 혼자만 ‘위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폭탄주 예찬론자들은 어색함을 깨는 데 폭탄주가 특효라고 말한다.
‘어색함 깨기’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다. 미국의 로펌(법률회사)들은 로스쿨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이스 브레이킹 파티(ice breaking party)’를 연다. 말 그대로 ‘어색함 깨기 파티’다. 파티에 초대받은 학생들은 로펌 간부들을 한 사람씩 찾아 자기소개를 하고 대화를 한다. 간부들은 학생들이 어떻게 부드럽게 분위기와 대화를 이끌어 가는지 눈여겨본 뒤 채용 여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은 로스쿨 공부보다 훨씬 어렵다고 한다. 교양과 겸손, 유머 등이 없으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쉽고 안이하게 어색함을 깨려는 것 같다.
미국 로스쿨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다양성(diversity)’이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대화와 경험을 나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로스쿨 연수생들은 좀 다르다. 기자가 있었던 로스쿨의 한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대화도 별로 없고 생각도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폭탄주 문화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폭탄주 자리에서는 생각이나 대화가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이다. 술잔이 몇 번 돌면 어느새 ‘하나’가 되니까. 물론 폭탄주의 장점과 효용도 많다. 그러나 획일적인 폭탄주 문화는 많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동료들과 함께 검찰 고위 간부를 만나 저녁을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자리가 끝날 무렵 그 간부가 말했다.
“폭탄주 한 잔도 못 드려서 미안합니다.”
한 기자가 대답했다.
“폭탄주 안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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