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폭탄주 안 주셔서 고맙습니다”

  • 입력 2005년 2월 6일 17시 49분


어린 왕자가 세 번째 방문한 327 별에는 술고래가 살고 있었다. 술고래에게 어린 왕자가 물었다.

“왜 술을 마시지요?”

“잊기 위해서 마신단다.”

“무엇을 잊으려고요?”

“부끄러운 것을.”

“무엇이 부끄러운가요?”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어린 왕자는 다시 지구별로 내려와 ‘고요한 아침의 술 동네’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로 갔다. 마을 통계에 의하면 그곳 어른들은 지난해 소주를 한 사람이 86병씩 마셨고, 양주도 300mL나 마셨다고 한다.

술 마시는 습관도 특이했다. 소주나 양주가 담긴 작은 잔을 맥주가 담긴 큰 잔에 넣어 한꺼번에 마셨다. 그것은 ‘폭탄주’라고 불렸는데, 빨리 삼키는 사람은 더 큰 박수를 받았다.

어린 왕자가 박수를 받고 자리에 앉은 아저씨에게 물었다.

“왜 폭탄주를 드시나요?”

“잊기 위해서.”

“무얼 잊으려고요?”

“두려움을.”

“무엇이 두렵지요?”

“술을 안 마신다는 사실이.”

“…….”

앞의 이야기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뒤의 것은 어린 왕자가 한국에 오면 어떤 일이 있을까 상상해 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술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모두 ‘위하여’ 하는데 혼자만 ‘위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폭탄주 예찬론자들은 어색함을 깨는 데 폭탄주가 특효라고 말한다.

‘어색함 깨기’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다. 미국의 로펌(법률회사)들은 로스쿨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이스 브레이킹 파티(ice breaking party)’를 연다. 말 그대로 ‘어색함 깨기 파티’다. 파티에 초대받은 학생들은 로펌 간부들을 한 사람씩 찾아 자기소개를 하고 대화를 한다. 간부들은 학생들이 어떻게 부드럽게 분위기와 대화를 이끌어 가는지 눈여겨본 뒤 채용 여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은 로스쿨 공부보다 훨씬 어렵다고 한다. 교양과 겸손, 유머 등이 없으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쉽고 안이하게 어색함을 깨려는 것 같다.

미국 로스쿨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다양성(diversity)’이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대화와 경험을 나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로스쿨 연수생들은 좀 다르다. 기자가 있었던 로스쿨의 한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대화도 별로 없고 생각도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폭탄주 문화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폭탄주 자리에서는 생각이나 대화가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이다. 술잔이 몇 번 돌면 어느새 ‘하나’가 되니까. 물론 폭탄주의 장점과 효용도 많다. 그러나 획일적인 폭탄주 문화는 많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동료들과 함께 검찰 고위 간부를 만나 저녁을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자리가 끝날 무렵 그 간부가 말했다.

“폭탄주 한 잔도 못 드려서 미안합니다.”

한 기자가 대답했다.

“폭탄주 안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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