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2] 헌법재판에 관한 부다페스트 국제학술대회. 한국 민주화와 헌법재판에 대해 발표가 끝났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놀랍다는 찬사와 함께 질문이 쏟아졌다. 성공의 원인이 무엇이냐, 한국이 어떻게 그런 성과를 거두었느냐 등등. 동유럽권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온 학자들과 법률가들이 밤늦은 사석에서까지 온갖 것을 물어왔다. 전야제 때 한국에선 아직 중국법을 적용하느냐, 군사정권이 없어졌느냐고 묻던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 되었다.
우리 헌법재판의 성공은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체제 전환국들과 인도네시아, 대만도 우리를 뒤쫓아 헌법재판소를 설립하고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우리 판례까지 면밀하게 연구 분석하고 있다. 모두 우리 제도를 여러 차례 보고 갔다. 한국 헌법재판을 연구한 영어권 법서도 출간되고 있다. 그간 악법에 대해 위헌 선언한 것만 280여 건이다. 가히 아시아 헌법재판의 종주국다운 명성을 보여 주는 성과다. 이것이 우리 헌법재판의 현주소다.
그러나 이는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 헌법위원회라는 어정쩡한 제도를 만들었다가 독재 권력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자 4·19혁명의 상징으로 헌법재판소를 처음 세웠다. 위헌법률심판, 최종적 헌법해석, 권한쟁의심판, 정당해산심판, 탄핵심판, 선거재판 등을 가진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기관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법 제정 후 1개월 만에 터진 5·16군사정변으로 헌법재판소는 불발로 끝났다. 그 후 대법원과 헌법위원회가 위헌심사권을 가졌으나 대통령과 국회의 전횡 앞에 무력했다. 1972∼87년 15년여의 무자비한 권력 앞에 인권이 짓밟히는데도 단 한 건의 위헌재판도 없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의 열기로 다시 헌법재판소를 살려 냈다. 그 후 다시 15년여, 우리는 헌법재판의 성공을 이뤄내었다. ‘한강의 기적’ 이후 제2의 기적이다.
헌법재판은 모든 국가권력의 남용을 통제하기에 언제나 정치와 법의 긴장 속에 있고, ‘권력과의 불화’는 운명과 같다. 1803년 사법심사를 발명한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헌법재판은 인권수호의 최후 보루이고 나라의 기본질서를 잡아가는 것이기에 어느 나라나 아끼고 발전시켜 가고 있다.
그간 일부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자기 이해에 따라 ‘검찰을 갈아 치우자’, ‘법원을 부수자’고 해왔다. 급기야 엊그제는 여당 의원 중에 헌재를 없애자고 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 근거도 황당하거니와 이런 반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인 인사에게 우리의 혈세를 줘야 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국민소환제도 생각이 났다.
그러나 나랏일을 충동으로 논할 수는 없다. 루쉰(魯迅)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가 밥을 헛되이 땅에 버렸다고 해서 농부가 그것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역사의 진보를 믿고 헌법재판의 수레바퀴를 계속 밀어야만 하는 소이연이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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