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두서없는 과거청산

  • 입력 2005년 2월 15일 18시 08분


작년에 묶어져 나온 ‘역사와 기억: 과거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의 국가별 사례연구’라는 논문집을 얻어다 다시 훑어봤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7개 팀이 독일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과거청산 사례를 연구한 것이다. 과거청산을 주도하고 있는 여권 관계자들이 연구책임자인 안병직 서울대 교수의 ‘전체 연구결과 개요서’만이라도 읽어봤으면 좋겠다.

안 교수는 과거청산이란 항상 미완(未完)의 형태라며 바람직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모범사례로 간주돼 온 프랑스의 과거청산도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 작업이 비교적 순탄하고 성공적으로 이뤄진 구(舊)동독의 경우도 과거청산은 사회적 합의보다는 갈등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했다.

▼‘늦게 태어난 자의 심판’▼

그러면서 안 교수는 일률적인 잣대로 과거를 완벽하게 청산하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명분과 당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현재의 정치적 필요성에서 접근할 경우 과거청산은 흑백논리적인 심판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과거청산은 과거규명보다 과거성찰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과거청산은 단죄를 통한 심리적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관용을 통한 미래지향적 노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청산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청산행위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는 역사의식이라는 게 안 교수의 결론. ‘역사학보’에 실린 그의 글을 인용해 역사의식의 의미를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진정한 과거청산의 길은 늦게 태어나 행운을 누리는 자가 일방적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불행한 체험의 당사자가 돼 함께 성찰하고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국가정보원 경찰 국방부 등이 각각 독자적으로 과거사 정리에 나서면서 부지불식간에 과거청산 정국이 조성되고 있으나 왠지 혼란스럽고 뭔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과거사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인데 권력기관들이 과거사 정리를 서두르는 것부터가 진실해 보이지 않는다. 화해란 표현은 영 어색해 보인다.

과거사법안은 물론 지난달 말에 발효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에 따른 조사기구까지 구성되면 앞으로 과거청산기구가 총 몇 개나 될지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조사대상은 또 얼마나 중복될 것인가. 이처럼 뒤죽박죽인 상황에서 안 교수가 요구한 엄정한 역사의식을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무리다. 적절한 조사와 합리적인 판단조차 제대로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애당초 집권세력이 권력기관을 동원하고 법률의 형식을 빌려 추진하는 과거청산에는 내재적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레이몽 아롱이 프랑스의 과거청산에 대해 “법적인 형식을 취한 혁명행위였기에 본질상 혁명가도 법치주의자도 만족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것을 굳이 상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프랑스와는 달리 최소 몇십 년 전의 과거를 청산하려 하기에 더욱 지난(至難)한 일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그런데도 광복 60주년인 올해부터 건국 60주년인 2008년까지 3년간의 역사적 상징성에 집착하는 여권이 과거청산의 발걸음을 늦출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광복으로부터 건국까지의 3년간을 ‘해방공간’이라고 하듯이 앞으로 3년간은 훗날 ‘청산공간’으로 명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청산비용을 치르게 될지 따져봐야 한다. 그 기간엔 대통령선거도 있는데….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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