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88>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2월 22일 19시 0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럭저럭 정오가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성벽 위에 나가 있던 장졸들의 외침이 잠시 성루 안에서 쉬고 있는 장함의 귀에 들려왔다.

“물이다! 큰 홍수가 났다!”

장함이 놀라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벌건 황토물이 발밑 해자로 물려들고 있었다. 전날 한군(漢軍)들이 파 놓은 물길을 따라 해자로 휩쓸고 드는데 그 기세가 엄청났다.

물은 그날 한군들이 모래주머니로 높여 둔 둑 때문에 점점 높이 차올랐다. 한식경도 안돼 성벽이 낮거나 허술한 곳을 밀어붙이고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낮은 곳부터 먼저 잠기게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함은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늦장마가 없었으니 그리 대단한 물은 아니다. 기껏해야 성안을 한번 적시고 빠져나갈 것이니 너무 겁먹거나 놀라지 말라!”

옹왕(雍王) 장함이 그렇게 장졸들을 북돋우고 다그쳤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안의 처지는 나빠져 갔다. 오래잖아 홍수는 폐구 성벽을 넘어 성안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물에 젖은 성안 군민(軍民)들은 저마다 놀란 외침을 내지르며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한군이 가득 탄 뗏목과 나룻배가 모래자루로 막은 강둑을 따라 줄줄이 성안으로 흘러들었다. 뗏목과 배에 나누어 탄 한군들은 물고기를 건지듯 몇 군데 높은 성벽과 성루에 몰려 있는 옹군(雍軍)을 거둬들였다.

드디어 장함도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렸다. 한군들이 탄 여러 척의 배와 뗏목이 자신이 있는 성루로 몰려들고 몰려드는 걸 보고 가만히 칼을 빼들었다. (틀렸다. 하지만 이제는 저 은허(殷墟)에서처럼 항복해서 목숨을 빌 곳도 없구나. 내 남아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일생 두 번씩이나 항복으로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한 땅의 임금이었으니 임금답게 죽을 뿐이다.)

장함은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빼 든 칼로 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20만의 진나라 사졸이 신안(新安)에서 산채 흙구덩이에 묻힐 때조차도 모르는 척하며 아껴 살아남은 목숨이었다.

돌이켜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장함의 최후였다. 2세 황제 3년 문관인 소부(少府)에서 대장군이 되어 죄수와 노예로 이루어진 20만군을 이끌고 함양을 출발할 때만 해도 장함은 진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승승장구해 관중으로 밀고 든 주문(周文)의 10만군을 한 싸움으로 쳐부수고 함곡관을 나간 지 두 달도 되기 전에 역도의 우두머리 진승을 죽였다. 그리고 정도(定陶)에서 무서운 기세로 밀고 드는 초나라 주력을 무찌르고 항량을 죽임으로써 군국(軍國)의 전통이 강한 진(秦)제국의 장수로서도 누구 못지않은 성예를 얻었다.

그런데 거록(鉅鹿) 싸움에서 한번 기세가 꺾이자 장함은 급속히 무너져 갔다. 조고(趙高)가 돌아갈 곳을 없게 만든 것이 원인라고는 하나, 대군을 거느리고도 무기력하게 항우에게 몰리다가 오수(오水)에서 또 한번의 참패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은허에서 20만 장졸을 들어 항우에게 항복한 뒤 옹왕까지 되었으나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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