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기획부(옛 국가정보원)에서 걸려온 전화에 이승완은 가슴이 벅찼다. 1987년 박종철 고문살해 사건 이후 민심은 흉흉했다. 야당의 거물 김영삼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동안 뒷일을 봐준 정계 ‘형님’들에게 보은할 기회가 온 것이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7년 4월 전국 18개 지구당 창당대회에 ‘주먹’들이 난입했다.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용팔이’ 김용남의 지휘로 ‘어깨’들은 군중에 각목 세례를 날렸다. 이승완은 행동대장 용팔이가 사뭇 든든했다.
이승완은 무도인 출신이다. 고교 때 태권도 전국대회를 휩쓸었고, 해병대 태권도부 창단 코치를 맡아 대통령배 대회 5연패를 이룩했다. 2003년까지 태권도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전북에서 힘깨나 쓴다는 친구들을 규합했고 주류 도매상을 운영하면서 유흥업계를 장악했다. 그의 일파는 경제적 기반을 갖췄다는 점에서 갈취만 일삼던 기존 폭력조직과 달랐다. 이승완은 ‘주먹이 살아남기 위해선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신조로 정계에 접근했다.
각목사건 직후 경찰은 “정당 내부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며 발을 뺐다. 그러나 민주화 열기는 ‘6·29선언’을 끌어냈고 1988년 4월 총선 때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됐다. 경찰의 태도는 변했다. 1988년 9월 ‘용팔이’가 검거되면서 “이승완의 지시를 받았다”고 불었다. ‘호국청년연합회’를 결성해 우익의 명사로 행세하던 이승완은 숨을 죽였다.
그로부터 1년 반 가까이 지난 1990년 3월 4일 이승완은 정부(情婦)의 집 앞에서 검거된다. 민자당 출범과 함께 김영삼이 여당 대표위원으로 변신한 지 두 달 만이다. 수배 중에도 버젓이 호청련 행사에 참석했던 그는 순순히 경찰차에 올랐다. 세상은 변했고 ‘보호막’은 몰락했다. 그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매듭은 1993년 3월에야 지어졌다. 신민당 의원이었던 이택돈이 폭력 사주 혐의로 구속되고, 배후 인물로 안기부장 장세동이 기소됐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이 채 안된 때였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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