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젊은 피 수혈 특수(特需)’를 누린 운동권은 현 정부 들어 ‘당-정-청(黨-政-靑)’과 시민단체를 장악하다시피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운동권은 원래 ‘노동 인권 학생운동 등과 같은 변혁을 위한 투쟁이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진력하는 사람들의 범위나 영역’으로 정의됐으나 이제는 ‘정치지망생 또는 정치예비군’을 뜻하는 말로 바뀌고 있다. 순수 운동권은 이제 천연기념물만큼이나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1990년대 ‘운동권’이란 단어를 처음 수록했던 국어사전도 개정판을 내야 할 판이다.
미래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오늘도 고시원과 운동권에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해마다 5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사법시험 행정고등고시 외무고등고시 기술고등고시 등 국가고시에 응시한다. ‘전현직’ 운동권의 수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는다.
육사를 졸업한 뒤 장군이 되거나 고시 합격 후 국장이 되려면 20여년의 세월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기간은 뼈를 깎는 자기 극복 과정이기도 하다. 승진 때마다 엄한 평가와 검증도 거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운동권은 어떤가. 투쟁성과 선전선동 능력 외에 전문성과 생산 능력을 제대로 검증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몇 번씩 감옥을 들락거렸다는 것을 ‘훈장’처럼 내세운다. 편향된 가치관을 ‘진보’로 포장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아무튼 편만 잘 가르고 줄만 잘 서면 육사 졸업생이나 고시 합격자에 비해 훨씬 쉽고 빠르게 권력의 핵심에 진입할 수 있다. 그러고도 청와대와 국회에 진출한 30대 운동권 그룹이 실력과 경륜을 겸비한 40, 50대 관료들을 향해 호통까지 치는 세상이다.
어느새 기득권 집단이 돼 버린 왕년의 운동권에 대해 ‘생선회는 굴비보다 빨리 상한다’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돈 먹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꼬집는 소리도 들린다. 검증되지 않은 이들이 ‘코드 확인’ 절차만으로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도 다행일까.
386과 포스트 386세대가 앞으로 40년간 대한민국을 주무르게 될 것이라는 인구사회학적 전망에 접하면서 기대를 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17대 국회 개원 초 중·소형차나 밴을 타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입성한 초선 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어느새 검은색 대형 세단으로 옮겨 탄 것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사회 각 분야에서 능력과 성과를 엄정하게 검증받은 실용주의자들이 우리 사회 지도층을 형성해야 한다. 지구상 다른 어디에도 이처럼 오래, 이토록 광범위하게 운동권이 장기 집권하는 나라는 없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