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高聲不敗’가 남긴 것

  • 입력 2005년 3월 18일 18시 28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시카고대 게리 베커 교수는 밑줄 긋고 읽을 만한 말을 많이 남겼다. 그는 “정계의 거물이 되려는 영리한 정치인은 당연히 ‘왼손잡이 유권자’ 편에 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규모가 작고 잘 조직화된 집단일수록 그들이 얻어내려는 정치적 혜택의 비용이 분산돼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이익집단은 많은 학자의 연구테마다. 한정된 재원으로 비용과 편익을 비교분석해 가장 합리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목소리 큰 집단이 ‘정당하게 가져야 할 몫’ 이상의 혜택을 자주 누린다. 정책 왜곡에 따른 피해는 조직화되지 못하고 침묵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잘 모르고 넘어가는 때가 많지만.

어느 나라에나 이런 모습은 있다. 미국에도 철강 섬유처럼 국제경쟁력이 낮아도 관련 업계 로비에 힘입어 지탱하는 산업이 적지 않다. 외국에는 자유무역과 개방을 요구하는 미 정부나 의회지만 때로 이익집단의 표를 의식해 자기 나라 시장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한국은 한술 더 뜬다. 떼를 지어 아우성을 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실제로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떼법의 득세’는 절차적 민주화가 자리 잡으면서 더 기승을 부렸다. ‘헌법 위에 떼법’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를 보여 주는 실례는 한둘이 아니다. 재개발이나 신도시 건설에 끼어든 각종 ‘불순물’. 외환위기 전 썩을 대로 썩은 기아자동차의 ‘국민기업’ 미화(美化). ‘그들만의 시민단체’가 반대하면 표류하는 국책사업. 노동계 일각의 이기주의와 탈선. 전체 국익을 생각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수도 이전이나 분할 논의.

정부와 정치권, 언론의 책임도 컸다. 사리에 어긋나거나 심지어 불순한 의도가 깔린 주장이라도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리지 않았다. 갈등의 봉합에만 관심을 쏟거나 허위의식을 부추기기도 했다.

목소리 큰 소수가 가장 빠른 출세의 길이 된 현실은 더 걱정스럽다.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말하면 최선의 합리적 선택이 된 셈이다. 시중에는 이런 냉소적 농담도 유행한다. “뭐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 가장 이문 남는 장사는 대학 가면 좌파 학생운동하고, 회사 들어가면 일은 뒷전이고 노조간부 하면 되지.”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씁쓸하지 않은가.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봐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어떤 분야든 묵묵히 일하면서 능력을 검증받은 뒤 순서에 맞게 올라가는 것이 제대로 된 조직이고 나라다. 한국의 풍토에서 지나친 고속 출세, 특히 그것이 주로 목소리의 크기와 업무외적 ‘코드’에 의해 결정될 때 과연 그늘이 없을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얼마 전 ‘고성불패(高聲不敗)’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목소리가 크면 패배하지 않는다는 풍토가 한국사회를 멍들게 한다는 뜻이다. KDI의 경고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고성불패’의 잘못된 풍조를 깨뜨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왼손잡이 유권자’ 편에 서는 것이 개인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기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왜곡된 신화는 더 늦기 전에 무너뜨려야 한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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