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김수환 추기경 서임

  • 입력 2005년 3월 27일 19시 27분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온 지 18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이 로마 교황 다음 가는 영예의 자리인 추기경을 배출한 날이다. 로마교황청은 1969년 3월 28일 동양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서임했다.

김수환(83) 추기경은 54년째 오롯이 성직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고 오랜 기간 성직의 최고 지위에 있어 왔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이기 전에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이 시대의 큰 어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등을 떠밀려 13세에 예비신학교에 들어간 이후 18년 만인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을 때까지 ‘장사를 해볼까, 결혼을 해볼까’ 회의가 많았다고 한다. 마산교구장이 된 후 2년 만에 주교들 중에서 가장 어리고 신참인 자신에게 서울대교구장이 맡겨졌을 때 그는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다시 이듬해 추기경이 되었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길은 없다’는 막막함이 먼저 들었다고 한다.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심리적 중압감과 고독감 때문에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가 많다는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시절 이후 지금까지 의사가 처방해 준 불면증 치료약에 의지해 잠들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1998년 주교 직무에서 은퇴하면서 조용한 시골 성당으로 갈까 고민했으나 귀족생활이 몸에 밴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그는 올해 초 회고록 발간 직후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에게 “가난한 자가 되고 싶다고 기도하던 내가 몸은 그렇지 않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모순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어느 자리를 막론하고 높은 자리란 때로는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 추기경도 때로 감옥을 나와 혼자 모자를 눌러 쓴 채 등산을 하지만 그때조차도 등산객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곡절과 혼돈의 현대사 한가운데서 대사회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용기 있는 신앙인 김 추기경. 그러나 그는 시국발언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을 고대해 왔다.

‘젊은 게 곧 권력’이 되어 버린 듯 온통 젊음 예찬뿐인 요즘 세상에서 팔십 평생을 성찰과 반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 추기경은 이 시대의 보배처럼 생각해야 할 큰 어른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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