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구로공단 준공

  • 입력 2005년 3월 31일 20시 23분


“바로 이곳에서 ‘난쏘공’(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약칭)이 시작되었다.”

작가 조세희는 2004년 11월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노동문학 강연을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정작 그 스테디셀러에서 공간적 배경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그늘, 부자와 빈자의 극명한 대비가 존재했던 1970년대의 상징이 구로공단임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다.

구로공단은 1967년 4월 1일 준공됐다.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 60만 평 땅에 수출 입국의 사명을 띠고 조성된 한국 최초의 공단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며 뿌듯해 했다.

구로공단의 주력 산업은 섬유와 봉제 가발 등 경공업이었다.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여성이었다.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10대 후반의 ‘누이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들은 2.5평짜리 판잣집이 빼곡한 이른바 ‘벌집’에 기거하며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했다. ‘공순이’라는 비웃음을 감내하며 고향 집에 월급을 부쳤고,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야학을 찾아 졸린 눈을 치켜떴다. 설과 추석 때면 가리봉 오거리에 줄줄이 늘어섰던 ‘귀향 버스’, 소녀의 감수성을 수줍게 분출했던 ‘음악다방’. 이들이 창출한 문화들은 1970년대의 아이콘이 됐다.

구로공단은 대학생들의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스스로 ‘시다’가 되고 기계공이 되어 노동운동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적 여성 노동운동가인 심상정(민주노동당) 의원도 그들 중 한 명. 이문열은 소설 ‘구로 아리랑’에서 대학생과 여공의 교감과, 이를 대하는 공권력의 냉혹함을 담담하게 그렸다.

구로공단은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굴뚝산업은 중국 등지로 떠나고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이 들어섰다. 음울한 이미지를 벗으려 했음인지 지하철역 이름에서도 ‘공단’은 지워졌다. 도시의 변신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의 억척스러운 누이들을 기리는 무엇인가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