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복거일]親日명단을 여론조사해 만드나

  • 입력 2005년 4월 1일 19시 05분


친일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늘 뜨거운 논점이었다. 식민지의 경험은 긴 그림자를 던지게 마련이므로 그 점은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점점 거세져 왔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가면 기억이 흐릿해지고 감정도 잦아들게 마련인데, 친일 문제에 관한 한 사정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위험스럽게 높아진 격정의 물살을 낮추는 일이 시급하다.

이 일에서 근본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친일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이다.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식민지 시대에 반민족적 행위를 한 사람들은 단죄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모두 682건의 사건들을 다루어 이 중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이미 ‘더러운 역사’를 정화(淨化)했다.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이승만 정권의 제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어 정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의 활동에 제약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화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본적인 제약은 친일 행위들이 친체제 행위들이어서 반민법이 ‘형벌 불소급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사실이었다. 그 법이 너무 가혹했다는 사실과 그 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북한의 첩자들로 밝혀졌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학생들 큰 일했다고 착각▼

역설적으로 그런 제약은 행운임이 드러났다. 정화를 하는 데 있어 ‘다다익선(多多益善)’이 기준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반민법에 따른 정화는 ‘친일파 인적 청산의 필요성’과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은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반민법이 공정한 재판들을 거쳐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북한에서의 친일파 처벌이 초기에는 주로 ‘인민재판’을 통해서 이루어져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이 때문에 북한이 친일파 청산 문제에 있어 대한민국보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른 일이고, 해로운 일이다.

따라서 친일 문제에서 법적 측면은 이미 합리적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친일 문제의 다른 측면들은 그동안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 차분하게 다루어져 왔다. 지금 친일파 청산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은 역사학의 영역에 속한 일들을 정치적 광장으로 끌어내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친일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런 비판이 자신들에게 결코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겨야 한다. 친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는 식민지 시대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면서 어려운 판단을 내려야 했던 사람들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보고서, 그들과 함께 고뇌한 뒤에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그렇게 길고 힘든 성찰을 통해서 도덕적 권위를 얻지 않은 채 그저 선인들의 행적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도덕적 권위를 얻었다고 여기는 것은 사회에 해로울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위험하다. 친일파 청산을 외치다가 자신들이 놓은 덫에 발목이 잡힌 국회의원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 역사학 영역으로 넘겨야▼

짧은 기간에 여론 조사를 통해서 자기 대학의 ‘친일 교수 명단’을 만들어 공표한 대학생들은 최근의 예다. 막 공부를 시작했고 판단이 미숙한 학생들이 어려운 처지에서 업적을 남긴 선인들의 명예를, 그것도 자신들이 다니는 대학의 물질적, 학문적 바탕을 마련한 옛 스승들의 명예를 마구 훼손하면서 큰일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며, 그들의 앞날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다.

이미 오래 전에 마무리된 일을 새삼스럽게 사회적 논점으로 만드는 일은 정상적이지 않다. 당연히 사회에 해롭다. 이제 친일 문제는 그것이 본래 속하는 곳에, 즉 역사학의 영역으로 넘겨서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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