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선후배 사이인 이들 부부는 1975년 호주 멜버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아예 이민생활을 하게 된다.
한글학자 고 한갑수 씨의 장남인 한 씨는 “공부가 끝난 뒤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4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이들 부부가 비집고 들어갈 곳은 없었다. 영주권을 받아놓은 터라 이민을 결심하고 다시 건너갔다. 교민이 200명에 불과했던 호주이민 초창기였다. 1983년에는 교민신문 편집인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한국과의 문화사업에 손을 댔다 실패하는 바람에 어린 외아들을 버스에 태우고 부부가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마땅한 직업이 없어 고전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어요.”(박 씨)
이민 1세대로서 부부가 전문직을 가진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 이들 부부가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이민 20년째인 1995년 역이민을 결심한 것은 한 씨 어머니의 죽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면서 일년에 대여섯번 귀국했습니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어요. 돌아가시기 전 모시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고요. 역이민을 혼자 결정한 셈이지요.”(한 씨)
“이민생활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저는 물론 반대했습니다. ‘장남이라는 것이 저주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박 씨)
갑자기 귀국한 이들 부부에게 역이민 과정은 이민보다 더 힘들었다. 급속히 변화한 한국사회에서 재입국 쇼크는 컸다. 외아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겠다는 한 씨의 소망은 이루어졌으나 주한 호주 대사관 이민부 매니저로 일하는 박 씨와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다행히 호주의 명문 중학교에서 한국의 학교로 전학 온 아들은 별 탈 없이 적응해줘 고마울 따름이었다.
박 씨는 2001년 명지대에 세계화 시대에 ‘이민’을 체계적으로 다룰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해 ‘이민학’ 석사과정을 개설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의 경험이 이민전문가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 씨도 같은 대학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멀리 돌아왔지만 한국과 호주라는 전혀 다른 두 문화권에서 살아봄으로써 조금은 세계화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도 키웠고요.”(한 씨)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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