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낸 여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는 남편에 대한 기억을 위해 ‘조각가의 기억력’을 가질 수 있기를 열망한다. 이 애절한 망부가(亡夫歌)의 주인공은 마리 퀴리(1867∼1934).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인물로 우리가 흔히 ‘퀴리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남편 피에르 퀴리(1859∼1906)는 아내가 워낙 유명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마리 퀴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도이며 아내를 세계 최고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906년 4월 19일 마차에 치여 47세로 사망했다. 아내 마리는 서른아홉 살이었고 두 딸은 아홉 살, 두 살이었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는 비탄에 잠겼다. 그리고 오로지 남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실험실만큼은 남편이 이 세상에 왔다간 가장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피에르는 노벨상 수상 후 소르본대 교수가 되었다. 1895년 마리와 결혼한 후, 뢴트겐의 X선 발견, H 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받아 방사능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인생을 꿈으로 만들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실험대도 배기장치도 없는 낡은 창고에서 폴로늄과 라듐 발견을 향해 고된 작업을 수행했다.
피에르가 사회와 타협하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면 마리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 마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논리에 따라 추론을 펴나가는 데 뛰어났다면 피에르는 직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데 뛰어났다. 그는 비사교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자연을 사랑했으며, 명예훈장과 교육공로 훈장을 거부할 만큼 탈속적인 사람이었다.
아내 마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라듐의 방사선을 쬔 결과 악성 빈혈을 일으켜 1934년 7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팡테옹에 남편 피에르와 함께 잠들어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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