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0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측근 비리와 관련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히자 사흘 뒤인 13일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자신에게 ‘정치적 승부수’를 배웠던 노 대통령의 이번 선택이 영 탐탁하지 않았던 것.
YS에게 국민투표에 대한 아픈 기억을 남긴 사람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한국 정치의 암흑기를 가져온 유신헌법은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91.5%의 찬성을 얻었다. 그 뒤 YS는 ‘민주회복과 헌법개정’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그 간절한 바람을 좌절시킨 것도 국민투표였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과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1975년 2월 12일 실시했다. 찬성률 78.0%.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내고 “국민투표에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다수 국민의 선택만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지만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이번 국민투표는 역사의 물결 앞에 있는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이택돈(李宅敦) 신민당 대변인은 “인조인간이 사람이 아닌 것처럼 관제(官製) 국민투표는 참된 민의가 아니다”는 논평을 냈다.
YS는 박정희의 ‘국민투표 활용술’에 치를 떨었지만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는 단연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었다.
드골은 1959∼69년 집권 기간 중 다섯 차례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특징으로 하는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독재를 우려하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정되고 국론 분열을 가속시키던 ‘알제리 독립 문제’가 단숨에 해결된 것도 국민투표 덕분이었다.
그러나 1969년 4월 27일 지방자치제와 상원의 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52.4%의 반대에 부닥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결됐다.
다음날인 28일.
“나는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중단합니다. 이 결정은 오늘(28일) 정오부터 발효합니다.”
드골은 이 말만 남기고 곧바로 낙향했다. 국민투표 결과에 자신의 진퇴를 연계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드골의 아름다운 퇴장은 그의 국민투표 정치를 비난하던 정적(政敵)들에게조차 ‘아픈 기억’ 대신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사사건건 드골에 반대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은 1981년 대선 승리 직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골이 만든 제5공화국 제도들은 내 생각과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나에게도 잘 어울린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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