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수는 며칠 전 ‘북한 외교관과 남한의 교과서가 빠져 있는 허수의 덫’이라는 논문에서는 우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동원자 수가 부풀려져 기술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의 연구결과 공개는 ‘절대악’으로 공인되다시피 한 일제(日帝)와 개발독재,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온 일반상식, 권위의 상징인 교과서 등 3대 철옹성에 한꺼번에 도전장을 내민 것과 같다. 학문적 용기가 없으면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를 편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감성이나 선전과는 차원을 달리해, 지적(知的) 탐구는 자유롭게 이뤄져야 하며 반론(反論)도 공론의 장에서 논의될 수 있는 사회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교수 같은 학자에게도 설 땅을 줘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신성한 것이며, 해석이나 평가보다 우선한다. 그런데도 기존의 해석이나 평가를 앞세워 사실에 대한 의문제기조차 원천봉쇄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팽배하다. 이런 속에서는 학문이 발전할 수 없다.
일본군 위안부는 움직일 수 없는 일제의 범죄행위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가 몇 명이었느냐 하는 것은 사실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도 숫자에 이의를 제시하면 ‘위안부는 없었다’는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박정희 시대에는 인권탄압이 많았다. 그렇다고 경제발전까지 왜곡·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의 왜곡 교과서를 비판하려면 우리도 사실과 진실의 기반 위에 있어야 한다. 적어도 학문의 세계에서는 ‘외로운 투쟁’이란 말은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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