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인이 법관으로서의 첫걸음을 총독부 판사로 내디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형사재판의 수요가 수십 배로 급증하자 전문학교 교수 자격을 지닌 사람들을 판사로 특별 임용했다. 가인은 경성전수학교 조교수직을 사임하고 그해 4월 16일 밀양지원 판사가 됐다.
3·1운동 주동자들은 법정에서 징역 6개월∼1년을 선고받았다. 가인은 판사가 되고 싶어 선택한 길이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은 동족을 징역 보내는 재판 업무가 괴로웠다. 그는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로 변신해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고 독립운동가와 소작쟁의 농민 변론에 나선다.
경향신문 법조 기자로 가인을 두 달 동안 매일처럼 만나 회고록을 대필한 김진배 전 의원은 “가인이 판사 자리에 집착해 총독부 판사를 한 것을 통탄스럽게 생각했다”고 전한다. 가인은 김 기자에게 “어떤 일이나 자리에 집착하지 말라”는 교훈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총독부 판사 1년 경력을 들어 가인을 친일파 법조인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없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시기의 활동만을 놓고 단선적으로 평가해서는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가인의 생애와 업적이 보여 주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나치스 치하에서 신학교 학생이던 14세 때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에 가입했다.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인 유겐트 가입은 의무사항이었다. 1943년에는 징집돼 뮌헨 근교 BMW 항공기 엔진 공장의 방공포대에서 근무했다.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지대에서 탱크 저지선 공사를 했다. 1944년 4월 탈영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베네딕토 16세는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도 아니었지만 공개적으로 저항을 하지도 않았다. 나치스라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 붙잡아오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들도 신임 교황의 유겐트 경력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고려대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행사를 수십 명의 학생 등이 폭력으로 방해했다. 고려대 전체 구성원에 비해 극히 소수였지만 그들은 다수가 합의한 평가를 무시하고 명예학위 수여식을 방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이 폭력으로 다수의 견해를 억누르는 쿠데타식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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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이나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모양이다. 가인과 베네딕토 16세처럼 20세기 격랑의 시대를 산 사람들은 순결무구(純潔無垢)하지 않고 어디 한 구석에 흠집이 나 있을 수 있다. 역사적 인물을 치우치고 단선적인 시각으로 재단하는 역사 고쳐 쓰기를 경계해야 한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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