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이 그 말에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지난번 팽성에서 크게 지고 쫓겨 오다가 하읍(下邑)에 이르러, 과인이 선생에게 천하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한편으로 끌어들여야할 사람을 물은 적이 있소. 그때 선생께서는 구강왕 경포를 그 으뜸으로 손꼽으셨소이다. 이에 과인은 수하에게 많은 금은을 주고 스무 명의 관원까지 딸려 보내며 경포를 달래보게 하였소. 경포가 구강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초를 어지럽히면 선생의 말씀대로 항왕을 몇 달이고 산동 땅에 잡아둘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경포는 항왕을 한달도 산동 땅에 잡아두지 못하고, 나라까지 빼앗긴 뒤 겨우 제 한 몸만 건져 이리로 왔소. 아무래도 그 이름이 실질보다 더 크게 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장량이 정색을 하고 한왕을 보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한때의 이기고 짐을 두고 천하의 인재를 저울질해서는 아니 됩니다. 비록 항왕의 기세에 밀려 잠시 낭패를 보기는 하였으나, 구강왕은 범 같고 교룡 같은 호걸입니다. 외롭고 고단해져 쫓겨 왔다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자 한왕도 정색을 했다.
“과인도 함부로 경포를 대한 것은 아니오. 의식주(衣食住)며 시중까지 왕후(王侯)의 예로 보살피게 하였으나, 점점 궁박하게 몰리게 된 신세를 떠올리다가 잠시 그를 맞음에 소홀했을 뿐이오.”
“항왕이 모든 힘을 한군데로 몰아 바람처럼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나, 그럴수록 구강왕 같은 이를 융숭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곧 닥칠 어려움에서 대왕을 구할 수 있는 이는 바로 구강왕이나 팽월 한신처럼 대왕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장량이 다시 한번 달래듯 그렇게 말하자 한왕도 굳어있던 얼굴을 풀었다.
“알겠소. 내일이라도 구강왕을 불러 그 상한 마음을 달래 주리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음날로 크게 잔치를 열고 경포를 불러 위로했다. 자리를 자신과 나란히 남면(南面)하여 앉히고, 같은 제후로서 예절을 갖춰 대접하니 그러잖아도 적잖이 풀려있던 경포의 마음은 한층 환하고 흐뭇해졌다. 스스로 신(臣)이라 일컬으며 충심으로 따르기를 다짐했다.
이튿날 경포는 먼저 자신이 결코 홀몸으로 한왕에게 도망쳐 온 식객이 아님을 드러내 보이려 했다. 형양까지 이끌고 온 부장(部將) 가운데 하나에게 신표(信標)를 주어 구강으로 보내며 말했다.
“너는 과인의 사자로서 구강으로 돌아가 흩어진 군사들과 관원들을 모아오도록 하라. 내가 부른다면 적어도 1만 명은 모일 것이니 그들을 데려오면 한왕께 낯은 들 수는 있게 될 것이다. 또 육현(六縣)에도 들러 태재(太宰)가 보호하고 있다는 과인의 가솔들도 함께 데려오도록 하라.”
강수(江水)에서 무리지어 도둑질을 할 때부터 경포를 따르던 그 장수는 기꺼이 사자가 되어 구강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구강으로 들어가 보니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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