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55>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5월 11일 19시 0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은 항백을 시켜 기어이 육성(六城)을 깨뜨린 뒤에 성안에 있던 구강왕 경포의 가솔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 부모처자를 볼모로 삼아 갖은 으름장을 놓고 겁을 줌으로써 경포가 이끌던 군사들마저 모두 거두어들였다. 이에 구강으로 숨어든 경포의 사자는 경포의 오래된 친구들과 구강왕으로서 아끼던 신하들을 중심으로 겨우 몇 천 명을 긁어모아 한나라로 돌아왔다.

한왕 유방은 경포의 처자가 모두 패왕이 보낸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가 거느리던 군사들마저 모두 초나라 군사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고 걱정했다. 경포를 불러 깊이 위로하고, 전보다 더 많은 군사를 나눠주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또 아직은 말뿐으로지만 왕호(王號)도 바꾸고 봉지(封地)도 크게 넓혀주었다.

“장차 구강왕을 회남왕(淮南王)으로 고쳐 세우고, 이전의 구강 땅 뿐만 아니라 여강(廬江) 형산(衡山) 예장(豫章)까지 모두 회남왕의 땅으로 떼어주겠소.”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한왕이 그렇게 경포를 보살핀 것은 어쩌면 태공(太公) 내외와 여후(呂后)가 아직 패왕의 진중에 잡혀있어서 느끼는 동병상련(同病相憐)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한왕은 경포와 함께 형양과 성고(城皐) 인근을 오르내리며 백성들을 다독이고 장정들을 긁어모아 군세(軍勢)를 불렸다. 점점 가까워 오는 패왕의 대군과 맞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왕과 경포가 성고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광무산(廣武山)에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적장 종리매가 이끄는 초군 2만이 마침내 광무산을 돌파하고 말았습니다. 번쾌 장군이 맞서 싸웠으나 적의 머릿수가 곱절인데다 기세까지 날카로워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싸움에 서 밀린 번(樊)장군은 지금 겨우 건진 5000 군사로 산성(山城)을 지키는데, 하루하루 버텨내기에도 힘겨울 정도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왕은 얼른 군사를 돌려 형양으로 돌아갔다. 항우의 대군이 이르러 농성전을 펼쳐야 한다면, 성고보다 성벽이 높고 두터운 형양 성안에서 싸우는 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한왕이 형양으로 돌아와 자리 잡기 무섭게 다급한 소식들이 잇따라 날아들었다.

“항왕이 이끄는 본진이 곡우(曲遇)에 이르렀습니다. 마보군(馬步軍)을 합쳐 10만이 넘는 대군이라 합니다.”

“환초와 계포가 길을 나누어 오창(敖倉)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군량을 그곳에서 날라다 먹고 있는 줄 알고 그곳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쯤은 벌써 오창 성을 에워쌌을 지도 모릅니다.”

“용저가 벌써 구강에서 돌아와 초군(楚軍)의 선봉이 되었다고 합니다. 광무산을 벗어난 종리매와 나란히 형양으로 밀고 드는 중이라 합니다.”

하나같이 가슴이 섬뜩해지는 내용이었다. 거기다가 일곱 달 전 팽성에서 당한 일이 떠오르자 한왕은 싸움이고 뭐고 다 내팽겨 치고 멀리 관중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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