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공사 등 건설교통부 산하 14개 기관이 2000년부터 작년 말까지 완공하거나 진행 중인 100억 원 이상의 공사 1322건 가운데 1185건이 설계 변경 등으로 평균 2년씩 지연됐다. 경부고속철도의 경우 1990년 6월 최초 사업비 추정액이 5조8000억 원이었으나 거듭된 설계 변경을 거쳐 1999년 18조 원을 넘어섰고 2010년 완공 시점에는 24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간회사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이었다면 일찌감치 부도가 났을 것이다.
오랜 기간 타당성 검토와 각종 평가를 거쳐 진행된 다른 대형 국책사업들의 경우도 정부가 몇몇 시민단체 등에 휘둘려 공사를 중단한 데 따르는 예산 낭비가 엄청나다. 한 스님의 단식으로 공사가 중단된 경부고속철 2단계 사업은 개통 지연에 따른 사회 경제적 손실이 2조5000억 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패산 터널 공사 지연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5100억 원이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을 혈세로 메울 수밖에 없다. 정부의 갈등 조정 기능 난조(亂調)가 이를 부추기고 있다.
1996년부터 올해까지 4대 강 유역 수질 개선에 11조 원을 투입했지만 그 많은 돈이 어디에 들어갔는지, 수질은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통량을 잘못 예측해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 등 3개 민자(民資) 도로에 매년 1000억 원 이상의 ‘최소 운영 수입 보장금’이 지원됐다. 이 돈도 결국 세금이다.
▼당신 돈이라면 이렇게 펑펑 쓰겠나▼
역대 정부에 비해 크게 늘어난 복지예산은 그야말로 돈을 주체 못하는 먹자판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고용안정화 사업에 배정된 예산 가운데 113억 원은 서울 강남에 있는 연면적 약 1750평 규모의 건물을 매입하는 데 들어갔다. 직원 1인당 중산층 아파트 넓이인 22.4평을 쓰는 셈이다. 여기에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관리비는 또 얼마인가. 전체 예산 5634억 원의 상당 부분이 고용안정에 별다른 기여를 못하고 있다는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다. 정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서민에게 가야 할 돈이 복지시스템을 운용하거나 그 주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수가 4.7% 늘었고 올해 공무원 인건비는 작년에 비해 1조1000억 원이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 말기 13개이던 대통령 직속위원회는 지금 22개다. 이들 위원회가 규정에 없는 인건비를 지급한 사례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예산 집행자들의 사재(私財)라면 이렇게 쓰지는 않을 것이다.
예산 투입 우선순위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예산을 최우선으로 써야 할 곳은 국가경쟁력을 배양하고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부문이다. 그러나 성장형 예산보다 소비형 과시형 예산에 돈을 퍼붓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호화 청사 짓기에 경쟁적이지만 민원 서비스 개선은 뒷전이다. 용인시의 1800억 원짜리 신청사는 ‘용인궁(宮)’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궁궐 같은 청사를 짓는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한둘이 아니다. 건물은 번듯한데 공공서비스의 질은 오히려 떨어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공공부문 경쟁력은 작년에 41위였다.
서울의 한 구청에서는 공무원이 근무기록을 조작해 야근수당을 횡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공직사회에서 관행화한 야근수당 횡령은 세금 도둑에 해당한다. 세금 집행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국회의원과 지방의원들도 세금을 펑펑 쓰는 외국 여행에 열을 올린다.
공공 부문만 예산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민간단체까지 툭하면 세금에 손을 내민다. 2003년에만도 500여 개 시민단체에 400여억 원의 정부 예산이 지원됐다. 정부 돈을 받고도 시민단체의 정치적 중립성이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부 단체는 처음부터 예산을 쓸 요량으로 설립된다.
민간 부문에 대한 무분별한 예산지원은 자생력을 약화시키고 구조조정을 지연시킴으로써 시장 질서를 왜곡하고 공정 경쟁을 오히려 저해할 수 있다. 전 국민이 낸 세금으로 특정 산업분야의 특정 기업에 차별적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정책은 위헌(違憲) 소지도 있다.
▼세금 난맥상이 民心 떠나게 한다▼
세금과 4대 의무보험의 보험료 인상으로 국민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연평균 8% 늘었다. 같은 기간 조세수입은 94조 원에서 147조8000억 원으로 연평균 11.9% 증가했다. 이 같은 부담률 증가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데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우리 국민의 조세부담률이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이야기만 한다.
각종 세제 개편으로 턱없이 늘어나는 세금 부담에 납세자들은 허리가 휘고 있다. 경기 침체와 구조조정으로 소득은 정체됐거나 줄어들고 있는데 세금과 4대 보험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른다. 정부는 민심 이반의 결정적 원인이 국민의 조세저항 심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공공 부문의 비효율과 비대화는 단순한 ‘정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민간 부문의 활력을 위축시킨다. 공공 부문이 비효율적인 낭비를 지탱하기 위해 기업과 가계에 막대한 세금과 준조세를 물리고 불필요한 간섭을 통해 시장의 활력을 앗아가는 것이다.
현 정부는 ‘세금 먹는 하마’인 공공 부문의 비효율을 줄이기 위한 공기업 민영화 정책도 사실상 중단했다. 공기업을 지방에 나눠 먹기식으로 이전하는 것이 개혁은 아니다. 민영화야말로 공기업 개혁의 핵심이다.
예산의 편성과 심의과정의 투명성도 낮다. 국회의 예산심의 과정에서 행정부처, 공기업, 국회의원, 지자체 간에 나눠 먹기 경쟁이 벌어진다. 불요불급한 예산을 받아 놓고 쓸 데가 없어 하루 자동차 열 대가 지나갈까 말까 한 산길까지 포장을 한다. 세금이 국민의 피와 땀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이렇게 함부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예산 5% 절감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지역균형발전, 분배개선 등의 예산사업을 재정의 감당 능력 이상으로 남발하는 경향을 보인다. 진정으로 국민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예산을 절감할 뜻이 있다면 허리띠를 졸라매는 자세로 세출 규모를 동결하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정부는 각종 사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 한정된 자원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불필요한 예산 증대를 가져오는 포퓰리즘적 정책과 형평, 자주 등의 국정목표도 현실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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