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2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방독 기간 내내 이 표현을 즐겨 썼다.
그는 동포 간담회에서 “한국과 독일 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타율에 의해 분단된 슬픔을 함께 지녀 왔다”며 “이 분단이야말로 세기의 최대 비극”이라고 말했다.
한독 양국은 분명 같은 병(분단)을 앓았지만 그 치료 과정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1969년 5월 30일 당시 서독은 각의에서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를 결정했다. 이 원칙은 ‘공산국가인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자동적으로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으로, 1955년 발터 할슈타인 외무차관 때 발표됐다.
한국이 ‘적(敵)의 친구는 적’이란 이 냉전 논리를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서독보다 4년 늦은 1973년. ‘6·23 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 특별성명을 통해서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
같은 달 25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제 남북한 관계는 바야흐로 통일의 전(前)단계인 공존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서독의 할슈타인 원칙 포기는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실천이 뒤따랐다. 1969년 10월 빌리 브란트 총리는 국정연설에서 “독일에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서독은 동독과 동등한 자격으로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 동방정책은 이듬해 3월 첫 동서독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두 달 뒤인 1970년 5월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의 답방도 이뤄졌다.
2000년 6월 열린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은 이보다 30년이 늦은 것이다. 그러나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답방은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동서 베를린 장벽 건너편의 어두운 또 하나의 세계(동독)를 바라다보며 우리나라의 휴전선과 판문점을 연상했다”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은 6·25전쟁 휴전(1953년) 8년 뒤인 1961년 만들어졌지만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월 독일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 과정은 독일과 달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일식 흡수 통일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후유증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
독일 통일 이후 15년이 지났다. 한반도가 분단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노 대통령의 기대처럼 저렴하면서도 후유증 없는 처방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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