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귀막고 사는 군론

  • 입력 2005년 6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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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가 3일 마련한 ‘21세기 한국사회의 변화와 언론이 나아갈 길’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해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이민웅 한양대 교수는 선출된 대표가 실패하거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대중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언론이 공론장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토론회에서 박승관 서울대 교수는 ‘군론(群論)’이라는 새 개념으로 국내 여론 형성 과정의 문제점을 진단해 주목받았다. 그에 따르면 군론은 자기주장만 외칠 뿐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 막은 이들의 소통 양식으로 군중의 특징이다.

박 교수는 “한국의 현실 정치가 개혁 명분에 토대한 ‘군론’에 의해 비성찰적으로 운영되면서 보이지 않는 억압 질서를 재생산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며 이른바 ‘개혁’ 담론의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소통 양식에 개인이 참여하는 말하기(입)와 듣기(귀)의 비율을 기준으로 대중(大衆) 군중(群衆) 공중(公衆)사회로 구분했다. 공중사회는 말하기와 듣기가 균형있게 활성화돼 ‘열린 토론’이 이뤄진다. 의견의 불일치나 대립이 받아들여지고 공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대중사회는 귀만 열려 있고 입이 닫혀 있어 국가적 사안에 대한 의견 표명이 제한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TV 등 대중매체가 말하는 대로 들어야 했던 수용자들이 이런 경험을 했다.

그러면 군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가?

군론의 사회는 듣지 않고 말만 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커지고, 소통의 대상을 편 가르기 하는 ‘아우성의 사회’다. 군론을 이끄는 이들은 전사(戰士)에 가까우며, 이분법적 논리가 횡행하고 떼쓰기와 우김질, 공격과 정벌의 언술이 창궐한다.

이 같은 현실 진단은 기자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현 정부의 개혁 논리를 뒷받침해 온 언론운동단체나 시민단체의 토론에서 ‘군론’의 일면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집회나 토론회에서 막말로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지성적 행태는 군론의 사례가 될 만했다.

박 교수의 지적은 한국 언론의 현주소도 되돌아보게 했다. ‘군론’이 퍼지는 데는 ‘열린 토론’의 마당을 제공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언론이 수용자에게 입과 귀를 모두 여는 쌍방향 소통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자기주장의 목소리로 시끄럽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인터넷상의 마녀사냥식 여론 재판이나 일부 시민단체의 이기적 행태 등을 보면 스페인의 문명비평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저서 ‘대중의 반역’에서 지적한 과잉민주주의(hyperdemocracy)에 대한 우려마저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행담도 개발 등 여러 정책에서 드러난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비판에 귀를 막은 정부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토론회에서는 ‘군론’에 대해 “참여의 긍정적 측면으로 닫힌 입을 여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단계”(김서중 성공회대 교수)라는 반론도 나왔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아직 군론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진단은 우리 모두에게 의견 소통 방식에 대한 성찰의 단초를 던져 준다. 그 첫 단추는 어렵지 않다. ‘목소리를 낮추고 귀를 열자’는 것이다.

허엽 위크엔드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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