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7>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7일 03시 0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아, 예. 잘은 모르지만 초나라 장수 여러분이 가끔씩 사자를 보내거나 글로 우리 대왕께 안부를 전해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무신군(武信君)과 의제(義帝)께서 살아계실 때는 한편이 되어 싸우시던 분들 아닙니까?”

초나라 사자는 그런 진평의 말을 듣자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싶었다. 물어보았자 그 이상 깊이 감춰진 속내를 알려줄 것도 아니거니와, 그때까지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초나라 군중(軍中)에 떠도는 말이 헛소문이 아님을 알기에는 넉넉했다. 이에 사자는 마음에도 없는 휴전 얘기를 꺼내 건성으로 떠들다가 성안의 사정 몇 가지를 곁눈질해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뭐 아부(亞父)까지? 그리고 종리매와 용저도 정말 한왕 유방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사자로부터 성안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들은 패왕 항우가 금세 시뻘개진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우두둑 이를 갈며 보검을 끌어당기는 품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낼 것 같았다. 사자로 형양성을 다녀온 군리가 놀라 패왕을 말렸다.

“대왕. 고정하십시오. 그들이 한왕과 내왕이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역심을 품고 내통하고 있는지는 신이 다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신을 접대한 자의 말대로, 그들은 한때 한왕과 한편이 되어 싸운 적이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모든 것을 깊이 알아보신 뒤에 처결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패왕은 제 분을 이기지 못했다.

“창칼을 맞대고 있는 마당에 사람과 글이 오고 가고 있다면 그게 내통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 이것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서는데 때맞춰 범증이 들어왔다.

형양성 안으로 들어갔던 사자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패왕이 보기에는 마음에 찔리는 게 있어 급히 달려온 듯 보였다.

“아부, 무슨 일로 이렇게 달려오셨소? 무엇이 궁금하신 거요?”

패왕이 억지로 속을 누르고 그렇게 넘겨짚어 보았다. 그러나 범증은 조금도 그런 패왕의 말을 껴듣지 않았다.

“형양성 안의 일을 알고 싶어 달려왔습니다. 이제 형양성을 우려 빼고 유방의 목을 얻을 때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는 사자로 갔다 온 군리에게 천연스레 물었다.

“그래, 성안 사정은 잘 살펴보고 왔겠지? 군민(軍民)의 사기는 어떠하고 식량 사정은 또 어떠해 보이던가?”

“군민에게는 한결같이 두려워 떠는 기색이 없었고, 주리거나 지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군리가 보고 온대로 대답했다. 범증이 잠시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패왕을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왕. 그것은 틀림없이 꾀 많은 장량과 엉큼한 유방이 부린 술책입니다. 군민을 몰아대고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퍼 대어 그와 같이 꾸몄을 것입니다. 사자를 속여 성안에 싸울 힘이 아직 남아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대왕에게서 휴전을 얻어내려는 수작입니다. 어서 전군을 들어 형양성을 들이쳐 천하의 우환거리를 뿌리 뽑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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