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下山 길의 동반자들

  • 입력 2005년 6월 7일 03시 06분


여당이 국민의 원성(怨聲)을 피해 보려고 청와대에 기합(氣合)을 넣는 형국이다. 대통령 탄핵파동 덕분에 제1당이 되고도 우왕좌왕하며 1년 이상 허송했으니 단체기합을 받아 마땅한 열린우리당이다. 하기야 ‘손 안대고 말로 코 푸는 데 이력이 붙은’ 이들에게 청와대와 국회를 내준 민초들도 억울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말의 백화점’ 같은 청와대에서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 한마디 보탰다. “두 번 배신까지는 용서하고 세 번째는 앙갚음하는 전략을 쓴다.”

말이 말을 낳는다. 누군가가 “대통령은 국민을 몇 번 배신했지?”라고 묻는다. 진짜로 대통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구나 싶기도 하다. 벌써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이네, 하산(下山) 길이네 하는 얘기조차 심심찮다.

그래서 여당 의원들도 할 말 좀 하게 된 걸까. 정장선 의원은 “대통령의 이상주의(理想主義)에 근거한 정책 추진이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직공(直攻)했다. 대통령이 주도한 지방분권, 부동산정책, 균형자론 등을 꼽았다.

위기의 뿌리가 청와대에 있고, 대통령과 직속위원회들이 합작해 내놓은 정책들이 ‘무늬 좋은 말’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빚고 있다는 데는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민생경제나 외교안보가 엉망이 된 까닭이 대통령의 이상주의에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대통령은 취임 열흘 뒤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정치인들에게 판판이 속는다. 그럼 왜 국민에게 봉사하는가. 권력을 잡자면 봉사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은 것을 주면서 더 주는 것처럼 속이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기술이 정치인에게는 아주 필요하다.”

탄핵 기각 직후 연세대 학생들 앞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속물적으로 살았다. 어떤 관념이나 주의를 먼저 내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했다기보다 내 앞에 닥친 문제들에 도전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야말로 정말 실사구시(實事求是) 차원에서 자신에 대한 도전에 응전(應戰)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된다.

요즘도 대통령은 ‘큰 화두(話頭)’를 계속 던진다. 어제 현충일 추념사에서는 ‘공동체적 통합’을 말했다. 4일 국가지속가능발전비전 선포식에서는 ‘경제 성장, 환경 보전, 사회 통합의 삼각축’이라는 말을 꺼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도덕성이 대통령 권력의 기반’이라고 강조한 대통령일지가 떠 있다.

그러나 국민은 거창한 말에는 별로 감동하지 않게끔 됐다. 구체적인 결과가 관심사다. 예컨대 “강남 불패(不敗)가 아니라 노무현 불패를 보여주겠다”(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 했는데 현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부동산정책이 처절하게 빗나갔으니 정책을 바꿀 것인지, 더 고집스럽게 극약 처방까지 쓸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은 말과 현실의 틈이 갈수록 벌어지는 데 대해 다수의 국민이 얼마나 냉소적인지 알 만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경제도, 외교도 청와대의 말과는 전혀 다른 수렁으로 빠져든다는 국민의 체감을 또 다른 말의 성찬(盛饌)으로는 완화시킬 수 없음을 읽어야 한다.

‘민생에 가해자(加害者)가 된 정권’이라는 최후 판정을 면하려면 모험적, 급진적으로 나라를 개조하려는 충동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그보다는 민생경제와 외교안보에서 줄기차게 흩뜨려 놓은 부분들을 메우고 수습해 실패를 만회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하산 길의 상책(上策)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론(空論)에만 강하고 현실적합성은 찾아보기 어려운 참모들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아직도 청와대는 물론이고 교육계 등에까지 코드 인사를 확대하고 있는데, 계속 이래서는 하산 길에 돌 굴러 내리는 사태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일지에서 ‘공직 인사권이 유일한 권한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차제에 인사 쇄신을 통해 주변을 바꿔보는 게 득책일 듯하다. ‘아마추어이면서도 최고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측근들의 끊임없는 실패 속에 갇혀 있는 한 대통령이 출구를 찾기 어렵지 않을까.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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