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유엔 사무총장을 10년(1972∼81년)이나 지낸 그는 국제무대의 실력자였다. 상징적 국가수반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오히려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자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 시절 내내 그는 외로웠다. 그를 초청하는 나라도 없었고 찾아오는 지도자도 없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한 6년 동안 바티칸과 중동 몇 나라를 방문한 것이 그의 외교성과의 전부였다.
어쩌다 외교무대의 ‘슈퍼스타’가 ‘추방자’로 전락했을까. 그 배경에는 ‘발트하임 사건(Wald-heim Affair)’이 있다.
1985년 가을 오스트리아 시사주간지 ‘프로필’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발트하임이 1938∼45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서 나치장교로 근무하면서 6만여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데 간여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진도 함께 실렸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빈 방문을 환영하는 오스트리아 나치돌격대 속에서 발트하임이 환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구성된 국제조사위원회가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위원회는 6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발트하임이 나치에 가담했던 것은 사실이며 유대인 학살을 직접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방관한 ‘도덕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발트하임은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이미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뒤였다.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자’ 명단에 오르는 수모까지 당했다.
1992년 대통령 재출마를 포기한 발트하임은 몇 년 후 발간된 자서전에서 “당시 나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나치 전력을 시인했다.
발트하임 사건을 계기로 전후 나치 협력자에 대한 조사가 철저히 이뤄지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에서는 과거사 반성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한동안 잠잠했던 나치전범 재조사 운동이 불붙었다.
유럽에서는 극우파 신나치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과거를 잊지 말자’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잊지 않고 과거의 죄와 씨름하는 모습이다. 그들에게 과거 청산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