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하태원]北 ‘회담일꾼’에 휘둘린 南 민간대표단

  • 입력 2005년 6월 9일 03시 05분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6·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할 남측 대표단의 규모가 8일 민간과 당국 대표단을 합쳐 300명으로 결정된 과정은 씁쓸하다.

북한이 당초 685명으로 하기로 했던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대표단 규모 축소를 요구한 데 대해 우리 측은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통일대축전 남측준비위원회 백낙청(白樂晴) 상임대표는 3일부터 3박 4일간 평양을 방문해 북측이 1일 요구한 대표단 규모 축소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왔다.

그는 출국 전 “남북 민간끼리의 약속은 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7일 귀국 때는 “합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측의 위기의식이 상상 이상”이라며 “축전 자체가 취소된 것이 아니고, 남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초 요구했던 축소 규모에서) 인원을 늘려 준 것은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백 대표를 비롯한 남측 대표단은 북측을 설득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북회담 경험이 없고, 평양 방문도 처음인 백 대표에게 북측이 보인 태도는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백 대표를 상대한 안경호 북측 준비위원회 위원장은 1990년부터 모두 8번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북측 대변인으로 활동한 ‘회담일꾼’이다.

그는 어떻게든 방북단 규모를 늘리려는 백 대표를 사흘간 애태우게 하다가 회담 마지막 날 밤 비공식 접촉을 통해 못 이기는 체하며 규모를 300명으로 한다는 데 구두로 합의해 줬다고 한다.

남북회담에 여러 차례 참여했던 전직 고위 당국자는 “노회한 회담 전문가인 안 위원장이 남측 대표단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북측은 이번에 이끄는 대로 끌려오는 남측 대표단을 보며 승리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측을 이해하려고 애쓰던 남측의 민간단체들조차 이번에 북측이 손바닥 뒤집듯 합의를 깬 것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있음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 같다.

하태원 정치부 기자 taewon_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