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1>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11일 03시 2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돌아보니 내가 거소를 떠나 처음 항량(項梁)의 군막을 찾아들 때도 이맘때였구나. 보자, 벌써 네 해가 지났는가.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망국(亡國)의 유신(遺臣)된 욕스러움을 면했고, 진나라를 쳐 없애 부조(父祖)의 나라가 당한 수모를 씻었다. 천하 만민을 가혹한 진나라의 법과 부세(賦稅)에서 구해냈고, 의제(義帝)를 세워 천하를 초나라의 것으로 하였다….’

첫날 오랜만에 한가로운 기분이 되어 그렇게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만 해도 범증의 가슴에는 뿌듯한 자부까지 일었다. 그러나 외로운 객사에서 쓴 술로 울분을 달래며 긴 밤을 보내게 되면서 이내 감회가 달라졌다.

‘하지만 한스러운 일이 너무 많구나. 선비(士)가 주인을 정해 천하를 도모한다는 것은 그 주인과 공과(功過)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 주인이 항복한 진나라 사졸 20만을 신안(新安)에서 산채 땅에 묻을 때 나는 무엇을 하였던가. 아무리 포악무도한 진나라였지만, 내 주인이 항복한 그 왕을 죽이고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칠 때, 진나라 도읍 함양을 약탈하고 백성들의 피땀으로 일으킨 아방궁을 불사를 때 나는 어디 있었던가. 제후들을 세우고 땅을 갈라주는 게 아까워 관인(官印)모서리가 닳아빠지도록 내 주인이 제후의 인수(印綬)를 내주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무엇 때문에 보고만 있었을까. 천하를 도모하고자 그 주인을 따라나선 선비가 할 일을 나는 과연 다하였던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범증의 가슴이 후회로 미어지는 듯하면서 갑자기 등허리가 뜨끔했다. 며칠 전부터 까닭 모르게 욱신거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범증에게 거듭 술잔을 권하다 마침내는 울분 섞인 한탄으로 바뀌었다.

‘저 더벅머리 아이가(수子)가 홍문(鴻門)의 잔치에서 내 말만 들었더라도 천하는 일찌감치 판가름 났을 것이다. 내가 권한대로 의제(義帝)만 끼고 있었어도 서초(西楚)는 오래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유방이 한중(漢中)을 나왔을 때는 오(吳)와 초(楚)의 전력을 끌어 모으고 천하 제후들을 모두 불러내 함곡관 서쪽에서 쳐 없애야 했다…. 그런데도 저 더벅머리 아이는 제 성을 못 이겨 살갗에 난 종기나 다름없는 전영(田榮)을 잡는데 힘을 쏟았다가 도읍인 팽성을 잃는 수모까지 당했다. 수수의 싸움은 볼만한 것이었으나 그 뒤는 마찬가지다. 어울리지 않게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유방에게 재기할 시간만 벌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무슨 하늘의 뜻이냐? 내일이라도 전력으로 형양성을 치면 유방을 사로잡아 천하의 형세를 결정지을 수 있건만, 대군을 성 밖에 조용히 묶어두고 있다. 피붙이와 처족만 믿어 가슴이나 배와 같은(心腹) 장수들을 의심하여 내치고…. 이 나마저 믿어주지 않는다.

아아, 내 명색 글을 읽은 선비로서 나아가고 물러남에 너무 등한하였다. 유방이 홍문을 빠져 나갔을 때 나는 한탄만 할 게 아니라 그 더벅머리 아이를 떠났어야 했다. 기어이 의제를 죽이고 말았을 때 떠났어야 했고, 굳이 전영을 치러 제(齊)나라로 출병할 때 떠났어야 했다. 그런데 미련을 부리다가 이 오늘을 보게 되었다. 내 살아 이 눈으로 무슨 험한 꼴을 보게 될까 실로 두렵구나….’

그러면서 마지막 식은 술잔을 비우는 데 갑자기 훅 치솟는 신열과 함께 등짝이 벌건 인두로 지지는 듯이나 뜨겁게 쑤셔와 술상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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