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지식 불황’의 위기

  • 입력 2005년 6월 11일 03시 27분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부시와 고어 후보가 벌인 선거토론의 수준은 각각 6학년과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수준이었다. 이것은 10학년(고교 1학년) 수준을 보였던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대선 토론에 비해 형편없는 것이다.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 역시 1858년 선거에서 링컨과 더글러스 후보가 보인 11학년(고교 2학년)과 12학년(고교 3학년)의 토론 수준에 비하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감각 중심의 영상시대를 맞아 인간의 지적(知的) 수준과 사고능력의 저하를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영국 켄트대의 프랭크 퓨레디 교수는 특히 신랄한 편이다. 그는 저서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화살을 정치인에게 겨눈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참여를 장려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 전체의 수준을 하락시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유권자의 표에 혈안이 되어 초등학생 수준의 정치논쟁에 매달리고, 대중 영합을 위해 가벼운 오락거리와 하찮은 ‘패스트푸드 문화’를 조장하고 또 이에 편승한다는 것이다. 퓨레디 교수가 ‘바보 만들기’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영상시대와 인터넷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자(文字)의 미덕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서 글자 읽기-문장 이해하기-상상하기-분석하기-비판하기-판단하기의 과정이 반복된다고 한다. 읽고 쓰면서 상상력을 키우고 진실을 분별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익히는 것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와 지식사회일수록 더 필수적인 힘이다.

젊은 세대가 문자와 활자(活字)에서 이탈하는 것도, 그로 인한 지적 불황을 우려하는 것도 어느 나라나 비슷한 현상이다. 각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국민을 읽고 쓰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미국은 올해 우리의 수능에 해당하는 SAT에 작문 시험을 처음 도입했다. 일본은 최근 ‘문자·활자문화 진흥법안’을 마련했다. 갈수록 ‘읽기’ ‘쓰기’가 실종되는 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응책이다. 어릴 적부터 신문과 책 같은 활자매체를 가까이 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이 핵심을 이룬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인터넷에서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영상매체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지식 불황에 따른 부작용도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인터넷 문화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고 정치논쟁에서 저질 언어는 아이들이 듣고 따라 쓸까 두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정부의 위기의식은 공백 상태다.

교육당국이 일선 학교에 일기를 강제로 쓰게 하지 말고, 잘 썼다고 상을 주지도 말라고 지침을 내려 보낸 것은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다. ‘일기 쓰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와 ‘일기 쓰기’ 교육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사생활 보호’의 이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가리지 못하는 교육당국은 자격 미달이다. 평등주의로 채색된 입시제도를 비롯한 교육제도는 지식의 위기를 걱정하기는커녕 지력과 학력의 저하를 앞장서 부채질하고 있다.

어찌 공무원만 탓할 수 있겠는가. 권력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정권과 일부 시민단체가 합작해 만든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을 위한 법률(신문법)’은 언론 차원에서 보면 위헌적인 신문통제법이지만 지식 차원에서 보면 천박한 문화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랜 지식 창출의 기반인 활자 매체를 죽이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문화 분야에 그럴듯한 비전도, 정책도 갖고 있지 않다. 처음부터 지식의 위기에 둔감했다. 퓨레디 교수의 지적처럼 혹시 국민을 ‘바보 만들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도 의심해 볼 일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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