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별아]비겁한 공무원들

  • 입력 2005년 6월 14일 03시 20분


여행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내 집 마련이 평생의 과제이자 목표나 다름없는 한국 사회에서 좁은 땅을 비집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숙박업소들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준다. 지금도 근엄한 표정으로 도리와 명분을 내세우는 일이 미덕인 한국 사회가 매매춘과 성폭력의 천국이라는 것 역시 기이하다. 할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는 유교의 성윤리가 여전히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도 불륜과 간통은 엄연한 현대의 생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쯤 되면 도대체 무엇이 마땅히 고수해야 할 도덕이고 윤리인지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덕과 윤리가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에 앞서 이미 변화하는 삶이 도덕과 윤리의 내용을 바꿔 가고 있으므로.

“불륜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찍었다”는 거짓 협박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53명의 공무원이 공갈범에게 1억3000만 원을 뜯긴 사건은 이러한 작금의 세태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한 폭의 풍속화다.

이미 비슷한 협박사건의 전과를 가진 범인은 자신의 경험적 교훈을 굳게 믿고 개과천선 대신 유사 범행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공무원은 불륜과 치정의 협박에 특별히 약하다는, 그리고 정면으로 맞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몸을 사리기에 익숙한 공무원들이 부러 경찰에 신고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범인의 단순하고 어설픈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무작위로 뽑은 전국 관공서의 사무관급 이상 공무원 1000명 중 53명은 증거도 보지 않고 평균 통화시간 3분 만에 돈부터 입금했으며, 나머지 중에서 그 누구도 1억3000만 원의 눈먼 돈이 뜯길 때까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실상 범인의 요구대로 돈을 입금한 53명이 실제로 불륜을 저질러 제 발이 저렸던 것인지, 그들의 군색한 변명대로 승진을 앞두고 나쁜 소문으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기관에 누가 될까봐 입막음을 하려 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일만 가지고 “이른바 공직자 또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이렇듯 향응과 부패에 익숙하며 성도덕까지 문란하다”며 싸잡아 비난할 것도 아니다.

어느 시민단체가 문란한 성도덕으로 공직자 전체를 망신시키는 이에게는 성욕의 인내를 촉구하는 정조대(?)를 보내겠다고 선언한 일은 코미디를 넘어서 엽기극에 속한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욕을 참아야 할 필요도 없거니와, 성문란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남의 욕망과 사생활까지 통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의 잠언이 서늘히 가슴을 스쳐 간다. “도덕은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특정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지극히 사적이고 개별적인 성도덕에까지 모범이 될 것을 바랄 수는 없다. 그들은 엄연한 범죄의 피해자였고, 그들의 개인적인 범죄를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공갈협박범이나 인사담당자나 악머구리처럼 들끓는 여론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죄 때문에 스스로 범행의 대상이 되었고 망신일지, 징계일지, 배우자의 이혼소송일지 모르는 결과로 어쨌거나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다만 ‘공무원 외도 협박 사건’이 한바탕의 소극(笑劇)을 넘어서 우려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공무원의 특성’으로 꼽히는 분노할 줄도 저항할 줄도 모르는 보신주의적 태도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자기혁신을 시도하며 묵묵히 사명을 다하는 많은 공무원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처럼 불의를 보고도 잘 참고 자기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 범죄까지도 묵과하는 태도로는 ‘철밥통’이나 ‘복지부동’의 오명을 씻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범죄 신고는 112, 경계할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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