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는 인구 2000여 명이 양치기로 연명하는 보잘것없는 섬이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말비나스라고 부른다. 굳이 가치를 따지자면 고래잡이 수역 확보에 유리하다는 정도. 영국이 한창 식민지 점령에 나서던 1833년 이 황량한 섬에 깃발을 꽂아 놨던 것이 전쟁의 씨앗이 됐다.
1981년 집권한 아르헨티나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1976년부터 이어져 오던 군부독재의 세 번째 주자. 민주화 요구에 경제난까지 겹쳐 민심이 술렁이자 갈티에리는 ‘국가적 자존심 선언’으로 리더십을 다지려 했다. ‘영국이 설마 이 버려진 섬 때문에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 전쟁을 하겠느냐’는 섣부른 판단도 거들었다. 그는 포클랜드에 군을 상륙시키고 자국 영토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였다. 집권 3년차였던 그 또한 ‘리더십 이벤트’의 필요성을 느꼈다. 외교로 해결하자는 의회의 제안을 뿌리치고 그는 선전포고를 택했다.
포클랜드로 출동한 영국 함대는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벨그라노호를 격침시키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당시 벨그라노호는 전쟁수역 밖에서 본토로 귀환하던 중이었으나 영국군은 인정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후 아르헨티나는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구축함 셰필드호를 박살냈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서구 사회는 깜짝 놀라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프랑스는 엑조세 미사일을 피하는 법을 알려줬고 미국도 ‘좌익 척결’의 공신이던 갈티에리를 버리고 영국 편에 섰다.
‘애국심 잔치’는 아르헨티나가 아닌 영국에서 벌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자원했고 왕실전용 요트 브리타니아호가 해상 병원 임무를 띠고 출전했다. 아르헨티나는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종전 직후 갈티에리는 축출됐고 알폰신이 아르헨티나 민간정권의 막을 열었다. 대처는 훗날 “포클랜드가 나의 살과 피가 됐다”며 장기집권의 에너지원으로 활용했음을 고백했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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