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文史哲 학자들도 분발하자

  • 입력 2005년 6월 15일 03시 15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이들 나라에서 무엇이 연상될까. 동유럽의 옛 소련 위성국, 요즘 자본주의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나라…. 얼핏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까.

좀 깊이 파고들면 탁월한 지식인을 많이 배출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의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곳 출신 석학(碩學)들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를 보자. 문학이론의 거봉 죄르지 루카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란 고전을 남긴 아르놀트 하우저, 좌파경제학의 거장 칼 폴라니 등이 헝가리 태생이다.

루마니아는 문학사회학의 창시자 뤼시앵 골드망, 20세기의 손꼽히는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 등을 낳았다. 인구 750만 명의 소국인 불가리아도 여성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 등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한국 지식인에게도 적잖은 자극을 주었다. 여러 저서들이 번역됐으며 그들의 글은 무수히 인용됐다. 지식의 국제수지를 따진다면 이들 나라는 흑자 국가, 한국은 현저한 적자 국가이다. 한국이 경제력에서 동유럽 국가들보다 앞섰다고 우쭐대면 부끄러울 정도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황우석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진다. ‘네이처’라는 권위 있는 과학잡지에 한국인 논문이 실리는 게 이젠 다반사가 됐다. 국내 토종 학자의 논문도 세계적인 학술지에 자주 게재된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은 반도체 기술 발전 속도와 관련해 ‘황의 법칙’이라는 야심 찬 이론을 주창해 주목을 끌었다.

물론 문과(文科)와 이과(理科)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학문성과를 외국어로 소개할 때 한국의 문과계 학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또 구미(歐美)의 가치체계로 이뤄진 문과 지식 무대에 한국인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이런 핸디캡을 인정하더라도 “문과 학자들의 열정과 기개(氣槪)가 예전만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인문학 쇠퇴의 원인을 ‘천박한 자본주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까. 작고한 언어학자 김방한 교수의 저서 ‘한 언어학자의 회상’을 보면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한국어의 뿌리를 찾는 치열한 도전정신을 느낄 수 있다. 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인 박춘호 교수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자라면서 호연지기를 품었고 마침내 세계적인 해양법학자가 됐다.

사회과학 중 경제학, 경영학은 한국인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한강의 기적’이나 한국 기업의 특수성을 연구하기엔 안성맞춤 아닌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숱한 엘리트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경제학, 경영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도 아직 세계적인 학자가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 명문대 박사인 어느 경제학자는 “사회과학 학자로서 대성하려면 구도자처럼 정진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권력, 치부(致富) 등에 대한 외부 유혹이 너무 많다”고 자성적 발언을 했다.

‘춥고 배고픈’ 인문학이라지만 이 분야에 대한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동시대인(同時代人)의 고뇌와 희망을 아우르는 학문적 성과를 낸다면 불은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인문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여전히 분투하는 조동일 교수의 ‘영원한 젊음’은 존경 받을 만하다.

문과의 발전 없이 이과만 성장하면 두뇌 없이 덩치만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과계 대학 교수들의 활약상을 갈망한다. 스님들이 여러 밤낮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듯, 곧 다가올 여름방학엔 학문 탐구에 몰두하시기를….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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