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4>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15일 03시 1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아부께서 남긴 글이 어디 있느냐? 어서 내놓아 보아라.”

패왕이 재촉하자 그 이졸(吏卒)은 품 안에서 흰 비단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바쳤다. 패왕이 펼쳐 보니 거기에는 눈에 익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신이 듣건대 새가 죽을 때는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 하였습니다. 간밤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신은 군왕의 믿음을 사지 못해 고향으로 내쫓기는 원통한 신하였으나, 이제 문득 죽음이 가까이 이른 것을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이 그저 부질없을 뿐입니다. 버림받은 분한(忿恨)에서 깨어나 곰곰 헤아리다가 반드시 군왕을 깨우쳐 드려야할 일이 있어 신열로 어지러운 가운데도 이렇게 붓을 들었습니다.

다섯 해 전 무신군(武信君)의 장하(帳下)에 들어 군왕을 모신 뒤로 신에게는 자랑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았으며, 그만큼 기쁨도 크고 한도 깊었습니다. 하오나 이제 영영 이 세상을 떠나려 하니 이 늙은 신하의 바람은 오직 하나 군왕께서 큰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처음 포의에서 몸을 일으킬 때와 달리 뒤틀리고 얼룩지기는 하였으나, 그 큰 뜻이야말로 신이 군왕께 의탁해 이루고자 했던 꿈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군왕께서는 한발만 내디디면 그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곳에서 오히려 이제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셨습니다. 적의 더러운 술책에 넘어가 가슴이나 배 같은 장수를 의심하고 팔다리 같은 신하를 시기하시는 병이 도졌기 때문입니다. 신의 짐작에 적은 간세(奸細)를 풀고 황금을 뿌려 군왕과 장상(將相)들을 이간질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간교한 잔꾀로 군왕의 눈과 귀를 속이고 가을 하늘 같은 심사를 어지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늙은 신하의 마지막 정성으로 엎드려 빌건대, 군왕께서는 먼저 군중(軍中)에 엄명을 내리시어 떠도는 거짓말과 헛소문의 뿌리를 캐고 거기 달려있을 간세들을 잡아 목 베십시오. 그리고 장수들을 불러 모아 군왕의 의심으로 다치고 억눌린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그런 다음 옛날처럼 아래위가 하나가 되어 형양성을 들이치면, 열흘도 안돼 성을 깨뜨리고 유방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형세는 그것으로 결정 나고 군왕의 날이 시작될 것이오니, 부디 신이 죽음을 앞두고 올리는 이 간곡한 당부를 물리치지 마소서.’

패왕이 원래 그리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범증의 글을 다 읽고 나자 그때까지도 자신의 고집에 가려져 있던 눈이 문득 훤히 밝아지는 듯했다. 겉잡을 수 없는 후회와 슬픔에 젖어 비단 두루마리를 내던지고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아부, 아부. 내가 아부를 죽게 하였소….”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먼저 장수들부터 불러 모으게 했다. 종리매와 용저를 비롯해 여러 장수들이 놀라고 겁먹은 얼굴로 모여들었다. 패왕이 그들에게 범증의 편지를 읽게 한 뒤 말하였다.

“과인이 이제 아부를 위해 발상(發喪)하려 하니 장군들은 모두 상복을 갖추시오. 우리 서초의 대군은 먼저 아부의 장례를 치른 뒤에 아래위가 한덩이가 되어 형양성을 들이칠 것이오. 반드시 성을 깨뜨리고 더러운 술책으로 우리를 이간질한 유방을 목 베어 아부의 외로운 넋을 달래주어야 하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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