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 소 500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방북한 일은 세계를 놀라게 한 이벤트였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아름답고 충격적인 전위예술 작품”이라고 논평했을 정도다.
‘가난이 싫어 가출을 거듭하던 소년이 세계적 기업가가 된 뒤 소 떼를 몰고 귀향한다.’ 이 콘셉트를 따서 시나리오를 써도 손색없을 만큼 팔순 노인의 ‘수구초심’과 ‘금의환향’은 드라마틱했다.
경제기적을 이끈 자본주의자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반(反)자본주의 체제가 만난 것도 역설적이었다. 북한이 저주해 마지않던 ‘자본주의의 괴수’가 그들의 생존을 좌우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군사대치 지역을 평화의 상징인 소 떼가 지나간다는 상징성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게다가 소를 실은 트럭마다 펄럭이던 ‘정주영’ 이름 석자와 급상승한 현대의 기업 이미지…. 소 떼 방북은 심금을 울리는 순정과 극적인 연출, 자본주의의 상술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데다 오래 기억될 상징성까지 다 갖춘, 빼어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소 떼 방북 5개월 후 금강산 관광선이 첫 출항하면서 얼어붙었던 남북 사이에도 햇볕이 드는 듯했다. 그러나 1년 뒤 서해교전 사태가 터졌고, 현대에서는 경영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이 불거졌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말년이 평온하지 못했던 정 회장은 2001년 3월 21일 눈을 감고 만다.
그는 사후에도 평온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북송금 특검 수사로 나라가 어지럽던 와중인 2003년 8월, 그의 아들인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으니.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노력이 남북관계 진전에 기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북한은 이제 한반도 전체를 볼모로 핵위협을 들이대지만, 금강산을 찾은 남한 관광객 수는 이달 초 100만 명을 돌파했다. 진퇴를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인 남북관계. 정 회장 부자가 하늘에서 굽어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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