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7>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18일 03시 0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래도 과인은 살기 위해 기신(紀信)을 죽을 구덩이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과인은 아직도 기신의 목숨을 살 만큼 그에게 베푼 것이 없다.”

한왕 유방이 솔직한 심경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게 바로 한왕이었다. 매사에 느긋하고 너그러운 편이지만,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추상적인 이치 같은 것으로 홀려 사람을 부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진평이 별로 표정 없는 얼굴로 한왕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대왕께서는 기신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건 또 왜 그런가?”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진평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진평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대왕께서는 전에 수수(휴水) 싸움에서 지고 초나라 군사에게 쫓기실 때 태자와 공주님을 태복이 모는 수레에서 내던지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는 왜 그리 하셨습니까?”

“그것들 때문에 수레가 느려져 과인이 초군에게 사로잡히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과인이 사로잡히면 우리 한나라도 끝이고, 과인을 따라다니며 싸워온 장졸들의 땀과 피눈물도 모두 헛일이 된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대왕의 몸은 이미 대왕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대왕을 따른 수십만 장졸들의 것이오, 천하가 바른 주인을 얻어 안정되기를 바라는 뭇 백성들의 것입니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이 위태로움에서 빠져나갈 길이 있다면 그리 하시어 뒷날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흙먼지 말아 일으키며 되돌아오시어 저들의 애틋한 믿음과 간절한 바람에 보답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한왕은 진평의 말을 얼른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내 자식이니 내가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신은 내 충실한 장수였다. 그를 죽여 가면서까지 이 한 목숨을 구차하게 살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말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진평이 그런 한왕에게 덮어씌우듯 잘라 말했다.

“심기를 굳건히 하시고, 내일 성을 나가실 때 함께 데리고 나갈 사람들이나 골라 두십시오. 신은 기신과 함께 초나라 군사들을 속일 계책이나 빈틈없이 짜보겠습니다.”

그리고는 한왕의 대답도 듣지 않고 길게 읍을 한 뒤 물러났다.

다음날이었다. 날이 환하게 밝자 갑자기 형양성 동문이 열리며 투구 쓰고 갑옷 입은 군사 수천 명이 쏟아져 나왔다. 아침밥을 짓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보고 놀라 싸울 채비를 했다.

그런데 다시 성안에서 누런 비단으로 덮개를 한 수레 한 대가 달려나오더니 군사들을 헤치고 나가 앞장을 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군사들이 먼빛으로 보기에도 심상찮은 수레였다. 바로 임금이 타는 황옥거(黃屋車)로서 수레 왼쪽에는 검정소의 꼬리와 꿩의 깃으로 만든 좌독(左纛)까지 내걸려 있었다.

먼저 싸울 채비가 된 초나라 군사 한 갈래가 서둘러 동문 쪽으로 몰려갔다. 군사들을 이끌고 간 초나라 장수가 황옥거 앞을 가로막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멈춰라. 수레에 탄 것은 누구며 어디로 가느냐?”

그때 수레의 주렴이 걷히며 임금의 복색을 갖춘 사람이 얼굴을 내밀고 대답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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