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고, 아내는 돌아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올해 들어 아내는 군에 있는 아이 때문에 네 번 눈물을 흘렸다. 연초에 훈련소에서 ‘인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내는 내 아이들이 그런 폭력 앞에 무방비로 놓여 있다는 것에 대해 울었고, 자동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중 군장을 갖추고 행군하는 부대의 긴 대오를 보고 다시 아들 생각이 나서 울었다.
얼마 전 병역기피를 위해 자식의 국적을 포기한 어느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 현재 일고 있는 국민적 공분을 ‘자기들은 능력이 안 돼 못하는 것뿐인데 그걸 샘내는 개 같은 경우’로 매도하는 것을 보고 고작 저런 인간들을 지켜 주기 위해 우리 아이가 군에 갔나 싶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엊그제 아내는 다시 울었다.
아내는 아이에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말과 참고 또 참으라는 말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한 사람의 사병 혼자 조심하고 참는다고 해서 비켜 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느닷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여덟 명의 장병은 또 얼마나 조심하고 얼마나 참으며 군대 생활을 해 왔겠는가.
사고를 낸 사병도 평소 구타와 같은 가혹 행위는 없었다고 했다 한다. 그것이 어떤 강도의 언어폭력인지는 모르나 경계근무 중 몰래 내무반으로 와 평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도 분명 잠자고 있었을 그곳에 수류탄을 던진 다음 총기를 난사할 만큼의 언어폭력이었는지, 군에 자식을 보낸 부모로서 선뜻 이해가지 않는 부분도 많다.
범행 사병이 언어폭력 때문에 그랬다고 말하고 있어 사고 원인 규명에서도 그 말이 어느 정도 힘을 받겠지만, 아비규환의 갈림길에서 천운으로 살아남은 병사들 가운데 누군가를 다시 ‘언어폭력의 원인자’로 몰아 놀란 가슴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자칫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 위험도 이 사건 안엔 분명 내재해 있다.
아이 면회를 마치고 집에 와서 또 한번 놀랐던 것은 같은 내무반에서 발생한 사고자 여덟 명의 시신을 네 군데의 병원에 분산시켜 놓은 모습에 대해서였다. 세상이 다 변하는데 어떻게 국방부와 군만큼은 1980년대 시민을 향해 총질을 하던 시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인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얄팍한 수인지 모르나 이게 국방부와 군이 자식을 잃은 부모를 상대로 펼칠 짓거리인지 생각해 보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조차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 않게 무력화해야 할 작전의 대상으로 여기듯 평소 우리 아이들의 목숨과 인권 역시 늘 이런 식으로 대해 왔던 것이 아닌가. 이번 사고 역시 바로 이런 비인도적인 방식의 임시방편과 책임의 순간 모면 시스템이 불러온 것이 아닌가. 우리 부모들은 20년간 자기 자식을 그야말로 곱게 키워 군에 보냈는데,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너무도 함부로 관리하며,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까지도 이따위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 후 또 한 아이를 군에 보내야 한다. 대체 이런 국방부와 군을 어떻게 믿고 작은아이마저 언제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를 위험 속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군에 있는 아이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두렵다. 이제까지 군은 우리 아이에게, 그리고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에게 늘 이런 식으로 대해 오지 않았던가. 우리 아이를 당신들의 아이처럼, 그리고 모든 일을 같은 부모 처지에서 대해 달라.
이순원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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