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런던행 비행 일정이 시작됐다. 방콕(태국), 카라치(파키스탄), 카이로(이집트), 암스테르담(네덜란드)에서 착륙과 이륙을 반복한 뒤에야 프로펠러 비행기는 런던에 내렸다. 총 19박 20일, 서울역에서 부산을 향해 열차로 이동한 일정을 더하면 20박 21일에 달하는 문자 그대로 ‘장도(長途)’였다.
최초로 ‘한국’ 국명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하계올림픽, 1948년 런던 올림픽의 한국 선수단은 그렇게 세계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이었지만 국민의 성원은 대단했다. 서울시 산하의 올림픽후원회는 공채(公債)격인 올림픽선수 후원권 140만 장을 발매해 참가 경비를 조달했고, 제헌국회는 선수들에게 보내는 격려 메시지를 채택했다.
애초에 큰 기대를 건 분야는 마라톤이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을 2시간 25분 39초의 기록으로 제패한 서윤복(徐潤福)을 비롯해 세계 상위권에 랭크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의 쾌거를 재현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홍종오와 서윤복이 각각 25, 27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낭보는 기대하지 않았던 역도에서 날아왔다. 김성집(金晟集) 선수가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복싱에서도 플라이급의 한수안(韓水安) 선수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최종 성적은 동메달 2개. 아시아권에서는 금메달 한 개를 기록한 인도 다음으로 좋은 성적이었다.
오늘날 한국은 88서울올림픽 이래 대회마다 종합성적 10위권 안에 랭크되는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57년 전 세계무대에 오르기 위해 한국 스포츠의 선각자들이 흘린 구슬땀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올림픽 출전 자격을 따내기 위해 이상백(李相佰) 당시 조선체육회 이사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브런디지 부위원장을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 결과 브런디지 부위원장은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맥아더 사령관은 하지 한국주둔군 사령관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마침내 신생 한국이 세계 스포츠 무대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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