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동관]우토로 마을의 한일 修交 40년

  • 입력 2005년 6월 23일 03시 02분


일본 교토(京都) 부 우지(宇治) 시에 있는 우토로 마을에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교토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1세와 그 후손 65가구 202명이 모여 산다. 이른바 ‘조선인 게토(집단거주지역)’다. 5월 6일 주민 가운데 서신웅 (60) 씨가 심장마비로 숨져 주민 수가 한 명 줄었다.

주민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의 날인 22일에도 강제 철거로 보금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지냈다.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토지 소유주였던 일본 측 기업이 낸 6400평의 땅 명도소송에서 주민들에게 패소판결을 내렸기 때문. 지난해 11월 땅을 사들인 새 소유주는 9월 말까지 땅을 사들이든지, 퇴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 왔다.

이 마을에는 일제 때 노동자 합숙소였던 ‘함바’가 두 채나 남아 있다. 1987년에야 겨우 상수도가 들어 왔지만 15가구는 여전히 양수기로 우물물을 끌어다 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 정부는 주민실태조사조차 한번 하지 않았다. 난민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겪어 왔고, 겪고 있는 고통에는 일제강점기 36년과 한일수교 40년의 어두운 그늘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다.

1965년 일본의 식민침략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이나 참회’ 없이 체결된 한일협정에서 이들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재일동포에 대한 보상이 아예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이 총련계였던 탓에 한국정부는 더 무심했다. 이런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마을이 존속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주민들의 호소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을 통해 보상이 매듭지어진 만큼 민사(民事)로 해결할 문제’라는 냉담한 반응이다. 한국정부도 기본적으로는 ‘민간모금을 통한 해결밖에 길이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다. 주민들의 자구노력과 민간모금으로 땅 매입자금 5억5000만 엔(55억 원 상당)에 모자랄 경우 재외동포 지원사업 예산에서 일부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국 정부의 태도에는 40년 전 ‘잘못 맺은 협정’에 따른 법적 책임의 불똥이 튈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보다 못해 양국의 시민단체가 연대해 4월 발족한 ‘우토로 국제대책회의’(02-713-5803 utoro@freechal.com)가 이달부터 모금에 나섰지만 한국 쪽의 모금액은 이날 현재 1500만 원. 사무국장 배지원(34) 씨는 “우토로 문제는 민간에 맡길 일이 아니라 협정을 체결하면서 자국민의 권리구제를 소홀히 했던 한국정부와 자국의 전쟁에 동원한 사람들의 생존권 위기를 수수방관하는 일본 정부가 공동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내에서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명분으로 한 과거사 청산의 바람이 거세다. 일본 쪽에서는 ‘전쟁책임론은 자학(自虐)사관’이라는 우익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두 민족주의가 충돌하는 어느 곳에도 우토로 주민들이 설 땅은 없다.

마침 양국 시민단체들이 땅을 사들여 재개발하면서 이곳에 강제징용피해 기념관을 짓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한다. 거창한 정치적 구호보다 우토로 주민의 ‘작은’ 숙원을 양국 정부가 성의 있게 해결하는 일이 진정 ‘커다란’ 과거청산 아닐까.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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