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93>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5일 03시 0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너는 저 사람을 알고 있느냐?”

“아무리 궁박한 처지에 빠져 있기로서니 내 오랜 벗 기신(紀信)을 못 알아볼 리야 있겠소?”

주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패왕의 물음을 받았다. 패왕도 여전히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달래듯 다시 물었다.

“기신은 과인의 눈을 속이고 한왕 유방을 달아나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게다가 언행까지 불손하여 이제 태워 죽이려다가, 네가 마침 그 오랜 벗이라 하니 먼저 묻고자 한다. 만약 네 벗도 살고 너도 살 길이 있다면 생각을 달리 해볼 수 있겠느냐?”

“그게 어떤 길이요?”

“네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기신도 살고 너도 살 수 있다. 또 네가 기신과 함께 과인을 도와 유방을 사로잡게 해준다면 너희 둘을 모두 제후로 삼고 10만 호(戶)를 봉할 것이다.”

그러자 주가가 크게 웃으며 패왕을 나무랐다.

“항적(項籍)은 듣거라. 네 일찍 잔인무도한 사람백정(人屠)으로 이름이 났으되, 앞뒤 막히고 답답하기는 마치 높은 담장 앞에 바짝 다가선 것 같구나. 너는 조금 전 네 발 앞에 굴러 떨어진 위표(魏豹)의 목을 보지도 못했느냐? 더구나 선비의 죽음은 네가 아는 그런 죽음이 아니다. 인의(仁義)를 따르고 충서(忠恕)에 맞는 죽음이라면 그 몸은 백번 죽어도 맑은 이름만으로 천추(千秋)를 사는 게 선비다. 내 벗은 이미 그 한 몸을 버려 천추의 삶을 골랐고, 나 또한 그리하려 하거늘, 네 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그와 같은 주가의 외침에 패왕의 참을성도 끝장나고 말았다. 이를 부드득 갈더니 불길이 뚝뚝 뜯는 듯한 눈길로 주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과인은 여정(呂政·시황제를 욕해 부르는 이름)이 왜 유자(儒者)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었는지 알겠다.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너를 사로잡아 네 말대로 해주겠다. 네 몸을 찢어발겨 백번을 죽여 네 이름을 천추에 길이 살게 해주마!”

그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차게 명했다.

“섶에 불을 붙여라!”

군사들이 시킨 대로 하자 기신의 발밑에 쌓인 섶과 장작더미에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

“잘 가게. 기신. 불행히도 우리 대왕께서 돌아와 구해주시기 전에 이 성이 떨어지게 되면 나도 자네 뒤를 따르게 될 걸세.”

주가가 그래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기신에게 작별의 말을 던졌다. 기신도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 묶여있는 사람 같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받았다.

“성현의 가르침과 함께하는 내 길이 외롭지 않으니 서둘러 따라올 것은 없네. 부디 형양성을 지켜내어 우리 대왕께서 반격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게.”

그리고는 호탕한 웃음으로 비명을 대신하며 거세지는 불길에 그을려갔다.

살펴보면 그런 기신의 죽음은 한조(漢朝) 400년의 벽두를 장식한 유가적(儒家的) 이념미의 한 극치였다. 유학(儒學)이 제도로 정착되어 나라를 떠받드는 것은 그 뒤 거의 한 세기나 지난 무제(武帝) 이후의 일이 되지만, 다소 느닷없고 애매한 대로 그 이념은 그때 형양성에서 벌써 휘황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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