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5년 6월 이 씨는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됐다. 지난 월요일 아침 필자와 만난 그는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보은(報恩) 인사’라며 제가 대통령에게서 엄청난 은혜라도 입은 것처럼 말하는 것은 좀 그러네요. 철도공사는 공기업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곳입니다. 노조는 강하고, 재정 상태는 부실덩어리고, 대민(對民) 서비스와 직결돼 바람 타기 십상이고. (지난해 총선 때) 부산에서 진 거야 그것대로 명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잘못하면 뭐가 남겠습니까. 속된 말로 ‘피박’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피박’ 쓸 위험이 있는 자리라면 안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라고 물으려는데 그가 앞서 “어렵다고 피하지는 말자, 여기서 지면 끝이라는 각오로 한번 해보자, 그렇게 결심을 했지요”라고 말했다.
공기업 사장자리는 공모(公募)가 원칙으로 돼 있다. 한데 그의 말은 낙점(落點)에 가깝게 들린다. 하기야 청와대의 인사수석은 “배려 케이스라고 해도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이 제 인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이 씨를 ‘배려’ 했고, 이 씨는 ‘피박’ 쓸 각오로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정치인 노무현과 이철은 대세보다는 나름의 명분과 원칙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코드’가 맞았다. 1990년 YS가 3당 합당으로 여권에 합류하자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잔류했다. 1995년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도 따라가지 않고 ‘통추’를 만들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두 사람의 진로는 갈렸다. 노무현은 김원기 등과 DJ에게로 가고, 이철은 제정구 등과 ‘조순의 한나라당’으로 갔다.
12대부터 14대까지 내리 3선을 하며 잘나가던 이철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점차 정치판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1997년 대선 후에는 정계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다시 정계에 얼굴을 내비친 것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하면서.
“당시 노 후보 측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어요. 정 후보 측에서 도와달라고 해 참여했지요. 그러나 곧 판단의 실수라는 걸 깨닫고 후보단일화에 앞장섰습니다.”
선거 전날 후보단일화가 깨지자 그는 즉각 정몽준을 떠나 노무현에게로 갔고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해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갑에 출마했다가 한나라당 정형근 후보에게 패했다.
노 대통령은 그렇게 이 씨에게 신세를 졌고 철도공사 사장 자리로 신세를 갚은 셈이다. 물론 공기업 사장을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와대 측 말대로 전문성보다 통합의 능력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지난날 전문가들이 경영했다는 철도공사가 어땠습니까. 1년에 1조 원 이상 적자를 내면서도 7∼8년 후에는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는 허위 보고를 일삼아 왔습니다. 정부도 대책 없이 그럭저럭 넘어갔고요. 이제 이걸 깨야 합니다. 그런 일은 과거의 잘못과 인과(因果)관계가 없는 저 같은 비전문가가 오히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조의 의견을 존중하기는 하겠지만 이면합의 같은 술수는 결코 부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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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사장으로 변신한 정치인 이철은 이제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그가 철도공사 사장자리를 정치 복귀를 위한 경력 관리 코스쯤으로 여기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낙하산 인사’의 성공 케이스를 보고 싶다. 30년 전 민주화의 열정을 이제 구체적인 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정치 사형수 이철’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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