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백석(白石 또는 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8세 되던 1930년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신문사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한 그는 1934년 귀국 이후 출판부 기자, 영어교사로 각각 2년씩 일하다 만주로 유랑을 떠난다.
‘자유’를 위해 생계를 버린 것이다. 뛰어난 기억력과 영어 실력을 가졌던 ‘모던보이’ 백석은 온갖 밑바닥 일을 전전하다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분단과 함께 남쪽에서는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모호했던 그의 행적은 최근에야 1995년 83세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대학 강사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김영한(金英韓·1916∼1999) 여사와의 러브 스토리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했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보시해 길상사를 만들게 한 주인공이다. 시인은 영어교사 시절 기방에서 그녀를 만났고 일본에서 공부까지 한 신여성이던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부모의 강권으로 다른 처녀와 두 차례나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때마다 며칠을 못 채우고 애인에게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 시민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모국어와 방언에 집착했다. ‘토속적이면서도 친근하고, 감각적인 시 세계’라는 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올해 5월 내로라하는 시인들은 그의 첫 시집 ‘사슴’(1936년)을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으로 꼽았다.
오랫동안 역사에 대한 가책과 회의, 고향에 대한 상실감의 토로로 읽혀졌던 백석의 시는 바야흐로 탈(脫)이념시대를 맞아 인간 삶을 관통하는 허무와 상실, 삶의 쓸쓸함을 노래한 것으로 읽히고 있다.
‘나 취했노라/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나 슬픔에 취했노라/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나 취했노라-노리다케 가스오(則武三雄)에게’ 전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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