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조심스럽게 개시된 대북 설득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이 성사됨으로써 국면전환 분위기를 만들었다. 북한으로서도 국제적 설득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북한이 6자회담 복귀의 수순을 한국과의 접촉을 통해 모색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통미봉남(通美封南·남한을 무시하고 미국과 대화함)’에서 ‘통남통미(通南通美·남한을 통해 미국과 대화함)’로의 변화다. 이는 향후 남북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지하다시피 1994년 북-미 간 타결된 제네바 합의 틀은 ‘체제보장’과 ‘핵무기 비확산’이라는 양자의 요구를 약속 형식으로 맞교환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3차례의 6자회담은 제네바 합의 틀의 연장선에 있다. 북-미 양국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이익을 다자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북-미 양자의 불신구조가 문제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핵 폐기를 위해 북한이 먼저 가시적 행동을 보여야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북한으로서는 체제에 대한 위협적 요소가 남아 있는 이상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심사였다. 이른바 ‘오만과 오기’의 충돌이었다.
여기다 6자회담 재개를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요소들이 추가됐다. 미국은 4차 6자회담이 3차 회의에서 제안된 미국 측 로드맵을 근간으로 논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만약 ‘체제보장과 핵 비확산의 맞교환’ 구도를 넘어서는 의제에 매달리게 된다면 6자회담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를테면 북한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논리나, 북한의 체제변화(regime change)를 내포하는 의제가 그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 공식선언 후인 3월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우리가 당당한 핵무기 보유국이 된 지금 6자회담은 참가국들이 평등한 자세에서 문제를 푸는 군축회담이 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또 북한의 핵폐기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한다. 미국의 핵위협 제거를 염두에 둔 듯하지만 회담 타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역할은 그래서 힘들다. 대칭적 타협이 가능한 의제와 단계에서부터 우선적으로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하다. 방법과 절차에 대한 중재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한 단계의 합의는 다음 단계를 위한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어느 일방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태도보다는 동시 행동성의 지혜를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회담 방식을 실용적으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생산적 회의를 위해 의제별로 실무진을 중심으로 한 논의 구도를 상설화해야 한다.
6자회담은 향후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국제질서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성공 여부에 따라 다자적 합의에 바탕을 둔 협력질서를 동북아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판가름 날 것이다. 한반도 문제가 다시 양극적 대립구도로 펼쳐지느냐, 아니면 국제적 보장하에 평화공존의 길을 넓혀가느냐는 6자회담의 성패에 달려 있다.
우리 정부로서는 이번 6자회담 재개가 한국 외교의 중재능력을 판가름하는 시험대다. 우리의 외교력을 ‘다걸기(올인)’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번 기회가 무산된다면 대립으로 치닫는 파국의 길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대화와 협상이 결렬되면 강경파가 득세할 게 자명하다.
김기정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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