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신연수]집 많으면 범죄자인가

  • 입력 2005년 7월 13일 03시 40분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는 암울했던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되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1970, 80년대 당시 대학가와 산업계에는 블랙리스트가 만연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대학생과 지식인, 노동3권을 외치는 근로자들을 경찰과 구사대가 폭행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잡아 가뒀다. 죄가 있고 없고 합법적이고 불법적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한 것이 블랙리스트였다.

이런 블랙리스트를 이번엔 부동산 투기 혐의자에 대해 만들겠다고 이 총리가 11일 밝혔다. 이 총리는 부동산 투기 혐의자를 “5만 명이 안 되며 은행에서 대폭 융자받아 투기를 일삼는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

국세청이 지난달 1가구 4주택 이상 보유자가 5만5000명이라고 밝힌 것을 감안할 때 ‘투기 혐의자’는 은행 대출이 많은 4주택 이상 보유자인 것으로 보인다.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부동산을 사들여 집값을 끌어올리는 투기꾼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행정부를 책임진 총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진중해야 한다. 집값이 급등하고 부동산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라고 해도 ‘사회적 범죄’, ‘사회적 암’, ‘블랙리스트’ 같은 극단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지나치다.

4주택 이상 보유자라 해도 세금만 제대로 내고 있다면 정부가 제재할 길은 사실상 없다. 무조건 범죄인 취급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다주택 보유자들이 부동산을 거래하면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동안의 세무 행정에 문제가 많았다는 얘기다.

은행은 수익과 리스크를 감안해 대출을 결정한다. 대출해 준 은행이나 대출받은 사람이나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올해 5월 말 현재 미분양 아파트는 5만 채를 넘는다. 한쪽에서는 집이 남고 정작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집은 부족해 값이 올라간다. 집값 상승이 모두 다주택 보유자의 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증거다.

총리까지 나서 극단적 용어로 몰아붙이는 것이 혹시 정책 실패에 대한 비난을 다주택 보유자에게 돌리려는 게 아니었으면 한다.

여론 재판만으로는 집값을 잡기 어렵다. 문제의 본질은 부동산을 최고의 투기 수단으로 만든 정책과 경제시스템이다.

신연수 경제부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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