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장량의 말을 듣자 한왕도 그 뜻을 알아들었으나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장량이 한왕을 찾아와 급하게 권했다.
“대왕 이제 움직이실 때입니다. 어서 성고로 군사를 내십시오.”
“자방(子房). 갑자기 무슨 일이요? 어제까지도 과인이 그리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조금 전 형양 성고에 풀어두었던 세작 하나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항왕이 종리매와 종공(終公)이란 장수에게 각기 형양성과 성고를 맡기고 팽월을 잡으러 동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팽월이 크게 일을 저지른 듯합니다.”
“그렇다면 고초를 겪고 있는 형양성을 구해야지, 어찌해서 성고로 가자는 것이요?”
한왕이 아직도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는 종공의 세력이 약하고 성고를 찾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종리매는 초나라 제일의 용장일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끄는 군사도 3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대왕께서 먼저 종리매를 치시면 그는 성고로 가서 종공과 군사를 합치고, 그 성벽에 의지해 맞설 수도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도 항왕이 그리했던 것처럼 불시에 성고를 들이쳐 성을 먼저 뺏어두면, 종리매와 종공 두 세력이 합칠 겨를이 없을뿐더러 그들이 의지할 성도 없게 됩니다.”
장량이 그렇게 일러주며 어서 군사를 내기를 재촉했다. 한왕도 더는 묻지 않고 장량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로 미련 없이 섭성을 버리고 성고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성고성 안의 초나라 군사들이 얼마 전 한나라 군사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했다. 한왕이 이끈 대군이 갑자기 성을 에워싸자 초나라 장졸들은 겁부터 먹었다. 종공이 칼을 빼들고 성벽 위에 서서 장졸들을 독려했으나 싸움은 한나절도 가지 못해 한군의 승리로 끝났다. 종공은 어지러운 군사들 사이에서 죽고, 용케 성에서 빠져나간 몇 천을 뺀 나머지 초나라 장졸들은 모두가 죽거나 항복해 버렸다.
“자, 이제는 형양으로 가자. 가서 종리매를 쳐부수고 성안에서 오래 고단했던 우리 장졸을 쉬게 하자.”
성고를 되찾은 한왕이 그렇게 소리치며 숨 돌릴 틈도 없이 군사를 형양으로 몰았다. 그러나 미처 형양에 이르기도 전에 군사를 이끌고 마중 나온 종리매와 한바탕 격전을 치러야 했다. 성고성에서 빠져나온 초나라 군사가 알려주는 바람에 마음먹고 대군을 몰아온 종리매라, 성고성의 싸움과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치열한 격전이었다.
멀리 높은 곳에서 싸움터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왕이 장량을 비롯한 여러 막빈(幕賓)들을 돌아보며 걱정했다.
“종리매가 워낙 맹장인데다 그가 이끄는 군사들도 별로 싸움에 져본 적이 없어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구려. 우리 풍패(豊沛)의 맹장들이 하나도 곁에 없는 게 실로 아쉽소이다. 이대로 종리매를 꺾을 수 있을지….”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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