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교수는 어제 동아일보 부설 21세기 평화연구소와 한국정치학회가 주최한 광복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는 1948년 4월 평양 남북협상(남북지도자회담)은 당시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한반도 관련 비공개 문서를 통해 “당시 정치국은 남북협상(4월 19∼25일)이 있기 직전인 4월 12일 이미 이 문제를 논의했으며, 남한만의 선거가 치러진다면 그 결과를 부정하고, 외국군대 철수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촉구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소련은 또 남북협상 남측 대표인 김구 선생, 김규식 박사 등이 아직 평양에서 협상 중인데도 정치국 전체회의를 갖고 북한의 헌법 초안을 승인했으며, 이후 최고인민회의 소집 등 정권 수립에 필요한 절차와 일정을 일일이 지시했다. 이보다 앞서 2월 3일 정치국 회의에선 인민무력부 창설까지 주문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김구, 김규식 등 이른바 남북협상파들이 마지막까지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 단정(單政)주의자들과 우파(右派)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부의 주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소련은 이미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됐을 때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분단의 책임 회피용으로 남북협상을 이용했음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분단의 책임문제는 앞으로도 더 규명돼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념과잉의 편향된 현대사 연구가 초래할 해독(害毒)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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