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감자를 기른 것 같지만 실은 감자가 우리를 길렀다. 그 생명력이 인류를 기아와 영양실조에서 구했다. 17세기까지 덩이줄기를 먹어본 적 없던 유럽인들이 미개한 피정복민의 주식을 달가워했을 리 없다. 백성을 영양실조에서 구하기 위해 왕실이 꾀를 썼다. 프랑스의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드레스 위에 감자꽃을 꽂았고 루이 16세는 왕실 부지에 감자를 심어 정예 호위병들에게 낮 동안만 철통같이 지키게 했다. 인근 빈농들은 예상대로 한밤중 다투어 그 왕실의 신비한 덩이줄기를 훔쳐갔다. 이 의도된 도둑 양성으로 유럽은 비로소 기아에서 벗어났다. 밀이 자라지 않는 지역이 세력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게 다 감자 덕분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우리의 굶주림 곁에도 언제나 감자가 있었다. 칠성문 밖 빈민가에 살던 복녀가 왕 서방의 밭에서 훔친 게 다름 아닌 ‘감자’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여름밤 피감자 한 사발을 두고 멍석 위에 둘러앉은 가족은 우리들 단란과 화목의 원형질이었다. 땅이 주는 보물을 훼손하기 아까워 그 시절은 감자든 고구마든 땅콩이든 으레 껍질째 삶았다. 뜨거운 감자를 손에 들고 얇게 껍질 벗겨 가는 순간의 그리운 득의와 포만이여!
강원도는 물론이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가 똑같이 감자를 구워먹고 쪄먹으며 살았다. 흠난 놈은 썩혀서 가루 받아 떡을 해먹었으니 쌀밥은 모자라도 감자만은 풍성했다. 덜 여문 감자를 가슴 두근대며 훔쳐 먹는 통과의례 없이 소년시절을 보내고서야 허전한 성인이 되기 쉽다.
만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윤동주의 시를 보고 알았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몽기몽기 왠연기 대낮에 솟나/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껌뻑껌뻑 검은 눈이 모여앉아서/옛 이야기 하나씩에 감자 하나씩’
아이스크림, 피자 같은 복잡한 조리과정을 거치고 갖은 재료가 혼합된 음식 앞에서도 저렇게들 눈을 껌뻑거릴 수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감자를 먹지 않는다. 구수하게 익어가는 내음과 순하고 덤덤한 맛을 외면하고 있다. 어른들이 싸구려 감자를 차마 제 귀한 아이에게 삶아줄 수 없어 자식에게서 감자 맛을 빼앗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맥도널드의 날씬한 황금빛 직육면체 감자, 빨간색 포장용기 위로 꽃다발처럼 솟아오른 프렌치프라이만을 감자인 줄 안다. 그건 제철 감자이기 어렵고, 소문으로는 원래의 유전자에 입력된 정보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놔둔 감자도 아니라는데?
아이들에게 말과 셈과 예절을 가르쳐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가미하지 않은 감자 맛을 가르쳐야 한다. 감자 맛을 모르면서 다른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알까? 자연 그대로의 음식 맛을 모르면서 제 삶을 제대로 맛볼 수가 있을까? 김이 오르는 감자 한 접시가 주는 행복의 절대치, 그건 1000원이면 1kg을 살 수 있고 10분이면 요리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고 진지하다.
조리과정이 간단하고 재료가 값싸고 맛이 단순한 음식을 즐길 줄 아는 것이 품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감자껍질을 벗기면서 함께 부를 노래가 있다.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충주사람 권태응의 노랫말은 ‘변하지 않는 진리란 감자꽃처럼 단순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게 바로 감자 맛이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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