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조금은 위로받은 불행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그녀의 생(生)은 위로조차 받지 못한 불행이었다. 미국 뉴욕의 한 건축사무실에서 만난 여덟 살 연하의 동양 남자는 그녀에게 빛이고 어둠이었다. 그녀는 사랑의 빛으로 길게 드리워진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 이국땅 쇠락한 궁전의 모퉁이에서 시집 식구를 모시고 살았을 터이다. 그러나 어둠은 끝내 빛을 삼키고 그녀는 버려진 이방인이었다.
▷1958년 미국에서 결혼하고 1963년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뒤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해 온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이 낳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되는 나라에서, 그것도 황손의 대(代)를 잇지 못하는 것은 큰 죄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국인인 그녀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종친(宗親)들은 이혼을 종용했고 결국 1982년 헤어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주지 않는 황세손비는 그렇게 홀로 남아 궁핍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서울의 한 외국인 임대주택에서 10년 넘게 바느질과 영어교습을 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95년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그녀는 미국 하와이의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2000년 가을 잠깐 서울을 찾았던 그녀는 5년 뒤 남편과 자신의 얘기를 다룰 영화 관계로 다시 서울에 왔다가 남편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묻는다. 못내 그리웠던 당신, “당신은 행복했나요?”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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