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을 열면….” 대형 정치적 사건이나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면 수세(守勢)에 몰린 측에서 심심치 않게 하던 말이다. 장세동, 이원조, 정태수, 장영자, 권노갑 씨 등이 비슷한 말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도 있었다. 김영배 전 의원은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이 끝난 뒤,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는 그 후 대선자금 비리와 관련해 “내가 입을 열면…”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세상에 알려진 사실은 빙산(氷山)의 일각에 불과하고 거대한 진실은 따로 있다는, 억울함의 호소이자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런 정치판의 ‘학습효과’일까. 엊그제는 YS 정권 시절 주요 인사에 대한 불법 도청을 자행했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미림팀’ 팀장이었던 공모 씨가 “내가 입을 열면 안 다칠 언론사가 없다”고 말했다. 퇴직 후에도 직무상 얻은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되는 전직 정보기관 요원이, 그것도 불법 도청한 내용을 무기로 세상에 대고 큰소리를 치는 격이다. 정보기관을 악용했던 못된 권력이 낳은 ‘못된 버르장머리’가 아닌가.
▷‘비밀은 간직하고 있는 동안은 당신의 수인(囚人)이지만 털어놓으면 당신이 비밀의 수인이 된다’는 유대 속담이 있다. 그래서일까. “내가 입을 열면…”치고 뒤에 입을 연 경우는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말이 아예 발붙일 수 없도록 정치 경제 사회 구석구석의 투명성과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불쾌하고 음습한 표현을 다시 듣지 않는 분명한 길이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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