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도청 테이프 ‘진실委’ 발상 위험하다

  • 입력 2005년 8월 2일 03시 01분


검찰이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방침을 굳혀 가자 여당이 ‘진실위원회’라는 이름의 기구를 만들어 테이프의 처리를 여기에 맡기려고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어제 문희상 의장 주재로 상임중앙위원회를 열어 제3자적 민간기구인 진실위를 설치해 국가안전기획부 불법 도청 테이프의 공개 여부와 처리 방향을 결정토록 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진실위는 그 이름부터가 ‘테이프에 담긴 진실’을 알아보겠다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것 같다. ‘진실과 화해위원회’ 같은 기구는 독재가 자행된 나라에서 인권 침해의 진상을 조사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화해시키고 국가 발전에 동참시키려는 방안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여당이 구상하는 방식의 진실위는 도청이라는 국가범죄의 연루자들은 영웅으로 만들어 주면서 피해자들은 두 번 죽이는 방향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불법 도청 테이프는 추악한 정보정치의 산물이고, 도청은 고문과 같은 범죄에 해당한다.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거나 수사 자료로 삼는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문을 합법화하자는 주장과 별 차이가 없다. 법정에서 증거로조차 쓸 수 없는 도청 테이프를 활용하려는 발상은 도청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열린우리당 전병헌 대변인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로 기구를 만들어 국민의 알권리 문제와 법률적 판단 및 한계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구정권 시절에 제작된 도청 테이프가 ‘구세력’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같은 결정을 했다면 도청 내용을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도청한 정권’과 ‘도청 내용을 이용한 정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더욱이 위원회 같은 공개조직으로는 테이프 내용의 보안을 유지하기 어렵다. 결정이 내려지기도 전에 내용이 흘러나가 다른 사회적 파장을 증폭시킬 것이다. 오죽하면 김종빈 검찰총장이 보고 과정에서 누설될까 염려해 압수 테이프의 내용에 관해 보고받지 않겠다고 했겠는가.

도청 내용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통신비밀을 침해하는 행위다. 이런 사건일수록 법리(法理)에 따라 냉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진실위 추진은 국가범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초법적이고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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